[박종면칼럼] 정몽구회장의 '화광동진'(和光同塵)

더벨 박종면 대표 2015.02.0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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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현대자동차그룹이 10조5500억원에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매입한 뒤 글로벌 로펌의 한 변호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일은 현대차 의사결정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소액주주들에 대한 배임행위다. 배당은 쥐꼬리만큼 하면서 보유현금을 함부로 쓰기 때문에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재벌의 비상식적인 의사결정과 지배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한다.” 현대차그룹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은 변호사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시장의 대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현대차가 한전부지를 인수한 지 5개월이 흐른 지금도 이런 시장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할까. 현대차그룹은 정말 큰 돈을 그냥 날려버린 건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싶다. 정부는 지난달 투자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삼성동 한전부지에 대해 2016년 조기착공 방침을 밝혔다. 정부가 먼저 나서 현대차의 신사옥 건립이 속도를 내도록 건축 인·허가 등 규제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롯데그룹은 잠실 제2롯데월드를 건립한 지 100일이 지나고도 제대로 영업을 못한 채 엄청난 시간과 돈을 낭비한다. 이런 현실에서 현대차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큰 의미를 갖는다. 돈으로 환산한다면 이것만 해도 천문학적 금액이 될 것이다.



앞으로 현대차그룹이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은 한둘이 아니다. 당장 이번에 매입한 한전부지와 여기에 건립 예정인 글로벌비즈니스센터를 업무용으로 인정받아 기업소득환류세제 과세 대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건축 인·허가에서 완공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부와 서울시의 협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차그룹은 한전부지 인수에 통 큰 베팅을 한 것 외에 여러 가지로 공을 들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창조경제혁신센터와 관련해서는 정몽구 회장이 광주혁신센터 출범에 앞서 두 번이나 현장을 방문했다.

특히 현대차는 박근혜정부의 투자확대 요구에 화답해 올해부터 4년간 매년 20조원 이상 총 80조7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현대차그룹이 국내외적으로 급성장해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잡은 것은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이후다. 이 과정에서 정부당국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큰 힘이 됐다. 박근혜정부는 물론이고 이명박정부, 심지어 노무현정부에서조차 그랬다. 최근 10년여 동안 재계에서 현대차그룹만큼 특혜시비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정부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곳은 드물다.

이를 배경으로 현대차그룹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자동차 판매를 오히려 크게 늘렸고, 현대건설 인수를 성공적으로 매듭지었다. 이제 글로벌비즈니스센터 완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또 하나의 현안인 승계문제도 오너의 결심만 서면 언제든지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단계인 것으로 전해진다.

‘뚝심경영’이라는 말로는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을 표현하는데 많이 부족하다.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은 뚝심도 있지만 나름 정교하고 치밀하다. 겉으로는 허술한 듯싶은데 속을 들여다보면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는 고수다. 게다가 용인이 뛰어나고 오너 본인은 물론 후계자까지 겸허하고 헌신적이다.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은 단순히 ‘뚝심’이 아니라 ‘노자’에 나오는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감추고 세속에 동참한다)이다. 또 ‘대교약졸’(大巧若拙, 큰 솜씨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이며 ‘대변약눌’(大辯若訥, 진짜 잘 하는 말은 어눌하다)이다. 요즘 방황하는 재계의 젊은 경영자들이 본받아야 할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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