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주 작가의 그림 '사슴뿔에서 피워올리다'. /사진제공=김혜주
동식물에 비해 눈에 띄지 않게 그려진 여인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위치를 나타낸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소한 존재인 인간에게 겸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얼룩말, 악어의 입속에서 뛰노는 새처럼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려왔다. 언뜻 보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 같지만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에게 ‘멜랑꼴리한 동화 작가’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도 그렇다.
화가 김혜주에게 그림은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동시에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진=이기범 기자
어린 시절 그를 괴롭힌 또 한 가지는 ‘난독증(難讀症)’이었다. 가족들은 문자를 읽는데 지장이 있었던 그를 머리가 나쁘다며 몰아세웠고 스스로도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글을 이해하지 못한 대신 시각적으로 내용을 파악한 그는 시각적 능력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화가를 꿈꾸게 됐다.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그는 그림 속 세계로 도망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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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던 대학 진학에 실패하며 또 한 번 좌절을 맛봤지만 “좋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고향 경남 삼천포를 떠났다. 대학생활에 정을 붙이지는 못하고 방황하던 그는 1991년 우연한 기회에 떠난 아프리카 여행에서 삶 전체가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문명의 혜택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마사이 부족을 만났어요. 글도 모르고 지식도 없지만 그들 눈에서는 행복이 흐르더라고요. 남들과 삶을 비교하면서 행복의 지수를 측정하고 좌절했던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하게 됐죠. 타인이 말하는 기준에 나를 맞추는 일이 굉장히 바보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김혜주 작가의 그림 '악어, 행복으로 꽃피다'. /사진제공=김혜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그림 속에 눌러 담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봐주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도 스펙도 뛰어나지 않는 예술가가 살아남기”란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었고, 그는 그토록 원하던 그림을 그리면서도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 본격적으로 뛰어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활동은 그의 인생을 반전시켰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알아봐주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눌러준 작품은 입소문을 탔고 ‘화가 김혜주’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덕분에 신세계를 만났다”는 그의 삶은 잡지의 고정 코너를 맡고 동화책 출간을 하게 되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동화적인 작품을 주로 그려온 김혜주 화가는 “앞으로는 그림에 현실을 담겠다”고 말했다. /사진=이기범 기자
“제 공감능력이 형벌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는 너무 심하게 아파서 거의 죽을 뻔 했어요. 배 안에서 순응하며 죽어갔을 아이들의 고통이 마치 저의 것 같았거든요. 그 다음부터 그림에 이상세계만 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현실을 직면해야겠다고 답을 내렸죠.”
이상적이든 현실적이든 그의 그림은 상처로부터 태어났다.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면, 화가 김혜주는 슬프지만 아름답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문의 02-511-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