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냐 아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4.11.08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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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15. 혜경궁 홍씨 : 정조를 건지기 위해 사도세자를 외면하다

남편이냐 아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남편과 아들이 동시에 물에 빠졌다고 치자. 두 사람 중에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아내는 누구에게 밧줄을 던질까? 딜레마다. 양자택일이 어려운 이유는 한 쪽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택하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힘든 법이다. 더구나 버려야 할 쪽이 남편이라면?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 때 혜경궁 홍씨도 이런 딜레마에 빠졌다.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혜경궁 홍씨는 당찬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누명을 쓴 남편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어린 정조를 앞세워 시아버지 영조와 맞장을 뜬다. 그러나 세자가 영조와 노론의 비밀을 캐고 선왕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녀의 입장은 난처해진다. 자칫 노론 가문인 친정은 물론 아들에게까지 화가 미칠 수 있어서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혜경궁 홍씨는 비정한 권력다툼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녀는 1744년 10살의 나이로 동갑내기 세자의 빈이 된다. 그 덕분에 하급관리였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일약 어영대장에 발탁되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사도세자가 변을 당할 무렵에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른다. 그는 노론 영수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장인의 손에 쥐어진 그 권력이 사도세자를 표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누군가 권력을 휘두르면 반대파가 생기는 게 정치의 생리다. 외척인 홍봉한이 노론의 실세로 떠오르자 김상로, 홍계희, 윤급 등 비외척 세력이 견제에 나섰다. 여기에 영조가 계비로 맞아들인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일파도 가세했다. 집권당 노론 내부의 암투였다. 그들은 홍봉한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도세자를 공격했다. 처음에는 정순왕후와 숙의 문씨를 내세워 세자를 무고하다가 1762년에는 나경언으로 하여금 세자의 비행을 고변하게 했다.



고변 내용은 해괴망측했다. 사도세자가 함부로 궁녀를 죽였으며 여승을 끌어들여 풍기를 문란케 했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몰래 평양을 미행했다는 것이다. 특히 세자의 평양행은 역모를 암시하는 사안이었다. 홍봉한의 진언으로 나경언을 죽이고 고변서를 불태웠지만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이때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친아들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성궁(영조)을 보호하옵고 세손(정조)을 건져 종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옳사옵니다. (사도세자에게) 대처분을 내리소서."

영빈의 종용을 받은 영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사도세자를 불러들여 뒤주에 가둬버렸다. 한여름의 뜨거운 뒤주 안에서 세자는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피 말리는 시간 동안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는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수수방관했다. 세자가 목숨을 잃자 영조는 곧바로 후회하며 애도했는데 만일 그들이 도중에 말렸더라면 최악의 참극은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조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영빈 이씨의 말에 감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빈이 세자에 대한 대처분을 주장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혜경궁 홍씨의 증언이다. 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대목이 실린 한중록 4편은 혜경궁이 순조 때 지은 것으로 아버지와 가문을 옹호하기 위해 사실왜곡을 마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빈 이씨에 관한 내용도 온전히 믿기는 어렵다.

영빈이 했다는 그 말은 어쩌면 혜경궁 자신의 속내였을 수도 있다. 당시 영조를 보호하는 것은 집정대신 홍봉한의 책무요, 정조라도 건지고 싶은 것은 어미인 혜경궁 홍씨의 마음이었다. 어차피 노론 내 권력다툼에서 밀리며 반대세력의 공세가 거셌다. 홍씨 가문이고 세자 일족이고 다 피 보게 생겼다. 이럴 때는 후일을 기약하며 출구를 여는 게 상책이다.

결과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이 재기로 이어지는 출구가 되어주었다. 홍봉한은 영조의 지원으로 반대세력을 탄핵하며 권력을 되찾았고, 혜경궁 홍씨 역시 개혁군주 정조의 어머니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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