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출근, 11시 퇴근'…어느 7급 공무원의 하루

머니투데이 김세관 기자 2014.09.2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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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 [위기의 대한민국 공무원 ③] 아빠도 잘 못 알아보는 딸…기업 스카우트 제의에 '흔들'

그래픽= 이승현 디자이너그래픽= 이승현 디자이너


국세청 본청 7급 조사관 L씨(34·남)는 전날 야근을 하고 자정을 넘겨서야 겨우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5시30분으로 맞춰진 휴대폰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 공무원연금 개혁 설문조사 하기

아침밥은 '언감생심'. 안방에서 자고 있는 아내와 딸이 깰까봐 조용히 씻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경기 구리시에 사는 L씨는 오늘도 서울 종로로 향하는 201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오전 8시 전까지 서울 수송동 국세청에 도착해야 한다. 다행히 버스는 신호에도 별로 안 걸리고 쏜살같이 종로에 다다랐다.

7시30분 조금 넘어 수송동 국세청 본청 정문에 들어선 L씨. 우선 아침 조간신문에 나온 기사들을 살펴보고 상관인 국·과장이 알아야 할 기사들을 참고자료로 정리했다. 늘 하던대로 오전에 있을 부서 회의 자료도 준비했다.



본격적인 업무는 8시30분부터 시작이다. 오늘은 전날 과장이 지시한 민원 업무가 산더미다. 민원 처리하고 과장 주재 회의를 마치고 나니 오전이 다 갔다. 청장이 바뀌면서 개최가 결정된 전국세무관서장회의 업무보고 준비도 해야 하는데 민원 처리가 끝나지 않아 애가 탄다.

12시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꿀 같은 담배 한 대를 태운 후 다시 사무실에 앉았다. 관서장회의에 보고할 부서 업무 내용 정리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보고 내용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오늘도 야근 예약이다.

업무보고 준비를 하던 중 다음 주에 있을 오랜만의 1박2일 지방 출장이 생각났다. 업무로 가게 되는 것이지만 일정부분 사비를 충당해야 해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하다.


L씨에게 지급되는 하루 숙박비는 4만원. 하지만 요즘은 어느 지역에 가도 4만원을 주고 숙박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여관비만 대개 4만5000∼5만원이고 좀 깨끗한 곳은 6만원을 넘는다.

우울한 마음에 지방국세청 조사국에 있는 동기에게 "뭐하냐"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메시지를 날렸다. 모 기업의 비정기세무조사(특별세무조사)에 나와 있다는 회신이 왔다. 탈세 혐의가 있어 회계·세무 자료를 예치하러 왔지만 협조가 안 된다는 전언.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밥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단다.

"나보다 더 바쁘군". 분명 조사국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자료를 기다리고 있을 동료의 푸념석인 SNS 메시지를 애써 외면하며 오후 업무를 마쳤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다 회계법인으로 간 선배와 저녁자리가 있어 7시쯤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다짜고짜 스카우트 제의를 해 온다. 국세청 출신의 젊은 조사관들은 세무조사 대응을 전문으로 하는 회계법인은 물론 은행, 대기업 등의 집중적인 영입 대상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두살배기 딸이 아빠도 제대로 못 알아볼 만큼 밤낮도, 주말도 없이 일하고 있지만 왜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욕만 먹는 공무원의 일상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명예'라는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져가고 있다. 그동안엔 대기업에 취직해 높은 연봉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래도 난 정년까지 일할 수 있고, 공무원연금이 있잖아"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하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연금개혁 논의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남은 일을 마저 처리하기 위해 저녁자리를 마치고 다시 국세청으로 돌아온 L씨. 10시쯤 짐을 챙겨 국세청을 나섰다. 오늘은 그나마 서무 업무가 별로 없어 평소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끝났다. "그래도 집에 도착하면 아기는 이미 자고 있겠지".

세무서에서 근무하면 상대적으로 업무강도도 낮고 야근도 별로 없지만 L씨는 승진을 위해 본청에서만 벌써 3년째 근무 중이다. 만약 올해도 승진을 못하면 정말 다른 길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L씨는 오늘도 퇴근길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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