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오너 유고 비용

머니투데이 성화용 더벨 편집국장 2014.09.2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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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재벌들은 '오너 회장'을 축으로 경영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오너가 있다. 월급쟁이 전문경영인은 할 수 없는 의사결정이 오너의 몫이다.

수십년 또는 100년쯤 되는 매우 먼 미래를 기획하는 일도 마찬가지. 그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 가까이 보면 현대차그룹이 통 큰 베팅으로 한전 부지를 인수한 게 그렇고 한 세대 뒤를 돌아보면 호암(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이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사업을 일군 일이 그렇다. 물론 그릇된 의사결정으로 기업을 말아먹기도 한다. 근년의 사례만도 동양, 웅진, STX 등 적지 않은 재벌들이 오너 스스로의 책임으로 망가졌다.



사업적 결단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지만, 이걸 제외하더라도 오너라는 '기구'가 비정상적으로 작동 불능 또는 오작동 상태에 빠지면 심각한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회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자리의 간부들은 그 동안 오너를 쳐다보고 살아왔다. 오너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하고, 그 결과를 오너로부터 평가 받고, 그걸 토대로 보상도 받았다. 그런데 오너 부재와 함께 어느 날 갑자기 '준거'가 사라지게 되면, '각자도생'의 이슈가 선명해진다. 제각기 생존 모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오너가 돌아보지 않는(또는 제대로 돌아볼 수 없는) 거대 조직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부하는 상사를 바라보고, 상사는 그 위의 상사를 바라본다. 결국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는 간부집단은 기업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문제는 그 목표 역시 '그들의 생존'을 원활히 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는 점이다. 적당한 숫자를 만들어 내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 이상의 성과가 예상되면 이듬해의 생존을 위해 억제한다. 투입에 비해 산출이 클 것으로 기대되는 사업이 등장해도 어지간하면 유보한다. 80%의 승률을 택하기 보다는 20%의 위험을 회피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단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어느날 오너가 다시 등장할 때 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이를테면 '노력을 절약하는' 방식으로 안전판을 만드는 셈이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오너 유고 비용이다. 평소에 오너 유고를 상정하고 시스템을 잘 갖춰놓은 기업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너가 지휘하는 기업의 태생적 특성이 그렇다. 그게 한국 재계의 현실이다.


최근 몇 년 새 오너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대기업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삼성, SK, 한화, CJ, 효성, 태광, LIG, 오리온 등이 그렇다. 각각 스토리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불의의 오너 유고 상태를 맞았다. 그 중에는 후계구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곳도 있고, 오너 회장이 부분적으로 경영에 관여하는 곳도 있지만, 온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예 대책 없이 방치된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면 '노력을 절약하는' 생존 방식이 서서히 조직에 스며든다. 위험이 수반되는 사업기회는 외면하고 목표를 넘는 성과는 감춘다. 기업을 키워 공생하는 대신 각자도생을 선택한다. 기업의 상황에 따라 정도와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와서 전문경영인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등을 떠밀어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너가 건재한 상태에서, 그 스스로가 개혁의 중심에 서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급한 상황에서 억지로 추진해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오너 경영은 한국의 기업들을 급성장시킨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제어하기 어려운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다. 이 체제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오너 스스로 삼가하고 절제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유고를 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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