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무대는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조선 철종 13년. 힘없는 백성의 편에 서서 의적 노릇을 하는 군도가 있었으니 이름 하여 ‘추설’이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백성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근까지 겹치면서 토지를 떠나 유랑하는 백성이 늘어났다. 그들이 관아를 습격해 곡식을 탈취하면 민란이 되고, 자리를 잡고 도적질을 일삼으면 군도가 되는 것이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군도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조직은 강원도에 뿌리를 내린 목단설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활동한 추설이었다고 한다. 군도 조직의 우두머리는 ‘노사장’이라고 불렀고, 그 아래에는 사무장 격인 ‘유사’를 두었다. 영화에도 노사장과 유사가 등장하는데 특히 유사를 ‘땡추’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군도의 집회가 곧잘 절집에서 열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승려가 조직의 간부를 맡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렇다면 군도가 사회가 금기시하는 도적질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꼭 ‘백범일지’가 아니더라도 군도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역사기록에 출몰하고 있다. 15세기 연산군에겐 홍길동 무장집단이, 16세기 명종에겐 임꺽정 부대가, 17세기 숙종에겐 장길산 반란군이, 18세기 영조에겐 명화적이 골칫거리였다.
사실 조선시대의 군도가 모두 의적은 아니었다.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어려운 백성을 도운 무리는 있었다 해도 소수였을 터. 단지 백성을 쥐어짜고 토지에서 내모는 체제가 그들을 의적으로 보이게 만든 것뿐이다. 군도는 무리를 이끌고 체제에 저항했다. 조정에서는 도적떼라고 깎아내렸지만 백성에게는 한 줄기 희망으로 비쳤다.
조선의 지배층은 건국이념과 달리 탐욕을 제어하지 못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노비가 되지 않으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부당한 체제에 대한 백성의 저항이 군도를 뒷받침하는 힘이 되었고, 19세기에 이르러 민란으로 번진 것이다. 결국 뭉치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인 셈이다. 그 속사정을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적의 무리 가운데는 하루라도 연명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저들은 도적질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굶주림이 절박하여 그리 된 것입니다. 그럼 백성을 도적으로 만든 자는 누구입니까? 세도가의 문전에서는 공공연히 벼슬을 팔고, 무도한 자들을 지방수령으로 보내 백성을 약탈하게 합니다. 백성이 도적이 되지 않고 어찌 살겠습니까?” - 명종실록 16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