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쓰는 기업들…투자대신 채권 산다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2014.06.18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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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저성장·저금리, 삶을 뒤흔들다]<3>

돈 안쓰는 기업들…투자대신 채권 산다


기업들이 돈을 안 쓴다. 경기 부진 장기화와 불투명한 전망이 빚어낸 한국경제의 현주소다.

현대차는 지난달 말 특정금전신탁(MMT) 10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고 공시했다. 올 들어 MMT 누적 매수액이 1조4000억원을 넘는다. 상반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미 지난해 연간 MMT 투자액(1조6500만원)을 넘어섰다. 현대상선도 연초부터 꾸준히 MMT 매수 규모를 늘리고 있다.

MMT는 필요할 때 즉시 빼내 현금화할 수 있는 수시입출금식 신탁 상품이다. 고객이 맡긴 돈을 단기자산인 콜(은행간 단기대출)이나 CP(기업어음), RP(환매조건부채권) 등에 투자해 굴린다. 대표적인 단기 금융상품이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기업과 기타 금융기관 등 법인자금을 중심으로 단기 MMT 예치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채권 투자도 늘고 있다. 올 들어 대기업을 포함한 일반법인은 장외채권시장에서 6조8500억어치의 채권을 순매수했다. 국채와 통안채 투자가 대부분이지만 은행채(1조6035억원)와 회사채(2조3681억원) 비중도 전보다 늘었다.

대기업들이 내부 유보금을 늘리는 것은 불확실한 경기 전망 때문이다. 경기부진에 전망까지 불투명하다보니 저금리 기조에도 투자보다 은행 예금이나 단기 부동자금으로 돈을 묶어두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해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유례없이 부진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설비투자는 122조8000억원으로 전년보다 5.5% 감소했다. 설비투자 증감률이 마이너스를 나타낸 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지난해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2.0% 늘었다. 돈은 더 많이 벌었는데 투자는 줄였다는 얘기다. 설비투자액이 감소한 업종이 IT(전기전자), 자동차 등 국내 주력산업이라는 점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IT업종은 설비투자가 전년보다 9.0%, 자동차업종은 5.5% 줄었다.

경기가 견고한 회복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정부의 진단에 의문부호가 달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낮은 금리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투자보다는 내부유보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도 시사점이 크다.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민간소비 회복세 둔화, 기업의 투자심리 위축 등으로 설비투자가 회복된다고 해도 낮은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가 30대 그룹의 투자·고용계획을 올해부터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경영환경 불확실성이 커져 보수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투자계획을 공개하기 어렵다는 재계의 의사가 받아들여졌다는 후문이다.

대기업이 사내 유보금으로 돈을 쌓아두는 것과 대조적으로 중소기업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4월 말 국회에 제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은행의 대기업 대출은 2009∼2013년 20% 늘었지만 비우량(5~10등급)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은 21% 감소했다. 정작 돈이 절실한 곳으로는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경기 부진과 불투명한 전망에 은행들도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라며 "다만 은행이 자금중개 기능 측면에서 '머니 파이프라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라고 말했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중에 풀린 자금이 실물 경제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단기 부동화가 심해지면 투자와 소비를 촉진하는 선순환 흐름이 망가지고 실물 투자가 위축될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변동성도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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