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광풍 휩쓸려 허공 속으로…
증권파동 가운데 제일 나쁜 게 수도(受渡) 결제를 불이행하는 것이다. 정해진 날 현금이나 주식을 건네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1962년의 5월 파동도 본질적으로는 수도 결제 불이행 사태다. 당시 청산(淸算) 거래로 이뤄지던 주식시장에서 결제일인 5월 말과 6월 말에 수도 결제하기로 약속한 매수자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주가가 폭락하고 급기야 증권거래소가 장기 휴장에 들어가는 사태까지 빚게 된 것이다.
대증주 주가 폭락으로 증권시장이 무기한 휴장에 들어간 뒤 서울 명동 증권거래소 뒤편의 장외시장에 거래인들이 몰려든 모습. 이때의 휴장은 1963년 2월25일부터 5월8일까지 이어졌다. /사진 제공=금융투자협회
이제 대증권에서 대증주(大證株)로 이름이 바뀐 증권거래소 주식은 거의 매일같이 1환씩 뛰어올라 4월18일에는 21환10전을 기록했고, 5월 들어서는 최고 42환50전까지 치솟았다. 불과 6개월 남짓한 사이 106배가 오른 것이다. 주가가 급등하자 증권거래소는 1월에 이어 4월에도 대규모 증자를 결의하고, 파동 직전인 5월22일 일반을 대상으로 9억9000만주를 공모했다.
대증주 폭등의 기폭제 역할을 한 증권거래소의 1962년 1월 증자 공고./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中情 등에 업은 윤응상 허황된 작전… 대증주 책동전에 다른 종목도 덩달아 폭등
투기 바람 불자 일반서민까지 뛰어들어… '2800% 프리미엄' 할증발행에도 "사자"
이 무렵 증권가는 투기 광풍에 휩싸여 있었다. 대증주뿐만 아니라 증금주(證金株, 증권금융회사 주식)는 6개월 사이 무려 300배나 올랐고 한전주와 미창주(米倉株, 미곡창고 주식) 해공주(海公株, 해운공사 주식)도 10배 이상씩 급등했다. 윤씨가 불을 붙인 투기바람에 웬만한 큰손들은 물론이고 시장상인과 암달러상, 심지어는 일반 서민들까지 뛰어들어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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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거래소 주주총회가 4월20일에 열려 새 이사장으로 한일은행장을 지낸 서재식씨가 선출됐다. 서 이사장은 6월20일 사임할 때까지 그야말로 가마솥 쇠죽 끓듯 요란한 대증주 책동전 바람에 두 달 동안 밤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임한 지 열흘 만에 4월 말 수도 결제 자금부족 사태를 맞았고, 한 달 만에 또 5월 수도 결제 불능 사태를 당했으니 제대로 무슨 일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동명증권 전무로 있었는데 5월 말이 다가오자 은근히 걱정이 됐다. 4월의 거래대금 1188억환 가운데 대증주가 53%나 차지했는데, 대충 계산해봐도 엄청난 금액의 수도 결제 대금이 필요했다. 내가 보기에 매수 측이 이를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5월 말로 접어들 무렵 나는 결제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밤 늦게 서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수도 결제가 어려울 것 같으니 대책을 강구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서 이사장은 괜찮을 것 같다며 가볍게 대답했다. 나는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막대한 물량의 건옥(建玉, 미결제 거래수량)으로 보아 큰 사고가 날 것 같으니 차라리 거래를 일시 중지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까지 내놓고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날 거래소 임원들이 서 이사장 집에 모여 긴급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신통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거래를 중지시키면 오히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만 야기시킬 수 있으니 그냥 밀고 나가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매도 측의 맹공세가 시작됐다. 매도 측의 주력은 나중에 해동화재보험의 사주가 되는 김동만씨였다. 김씨를 비롯한 매도 측의 투매공세가 워낙 강력해 매수 측의 부담은 갈수록 커져갔다. 당시 매수 측의 사정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윤씨 계열의 증권회사인 일흥증권의 시장대리인으로 강보국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장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매도 물량을 숨쉴 틈도 없이 받고 또 받았다. 그러다보니 몸도 지치고 정신도 혼미해져 끝내는 거래소 입회장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졸도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던 시장은 의사를 부르랴 병원에 싣고 가랴, 그야말로 광란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날 시장대리인 한 명이 쓰러질 정도까지 매도물량이 늘어났다는 것은 결국 수도 결제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예고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5월 말의 수도 결제 대금은 모두 580억환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더구나 이중 80%를 윤씨 계열의 통일증권과 일흥증권, 그리고 윤씨가 거래창구로 이용한 동명증권, 이렇게 3개사가 차지했으니 수도 결제 불이행의 위험성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동명증권은 매수 측 주력 3개 사 중 하나였으나 통일증권이나 일흥증권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동명은 적어도 자체 책동은 없었다. 윤씨의 매수주문을 제일 많이 취급하다보니 결과적으로 매수 측 주력 증권회사가 된 것뿐이다.
아무튼 5월 한 달간의 주식 거래대금은 4월의 2배가 넘는 2520억환에 달했는데 이같은 금액은 1956년 증권거래소 개설 후 1961년까지 6년간의 총 거래대금 2740억환과 거의 맞먹는 것이었다. 결국 매수 측 3개 증권회사는 자금부족으로 결제대금 580억환 가운데 352억환을 납부하지 못했고 이렇게 해서 5월 파동이 표면화된 것이다.
시장을 우습게 보면 모두가 대가 치러… 5월 거래량 폭발, 과거 6년치 맞먹어
매도 홍수에 시장대리인 졸도하기도… 끝내 최악의 사태, 장기 휴장 쇼크
1962년 5월 파동 후 통화개혁으로 6월11일부터 휴장한 증권거래소가 7월13일 한달 만에 거래를 재개하자 주가가 의외의 강세를 보였다고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강성원씨를 비롯한 당시 중앙정보부 사람들은 증권의 증자도 모르면서 윤씨의 허황된 공언을 믿었던 것이다. 혁명을 했으니 정치자금 조달 방식도 혁명적으로 바꿔보겠다는 게 그 사람들 생각이었지만 증권시장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들은 윤씨를 통해 적지 않은 돈을 가져갔겠지만 혁명정부의 도덕성은 치명상을 입었다. 내가 보기에는 중앙정보부 사람들도 결국 이용만 당한 꼴이 됐다.
5월 파동의 진실은 누구도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누가 얼마나 벌었는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무모하게 작전을 벌였던 윤씨는 처음에는 돈을 좀 만졌으나 결국 다 허공 속에 날려버렸다. 5월 파동 이후 폭락을 거듭한 대증주 주가는 1963년 들어 20전(화폐개혁 후 단위로는 2전)까지 떨어졌다. 파동 직전 대증주 공모 때 14환50전에 주식을 매수한 일반 투자자는 무상증자(1주당 2주씩)를 감안하더라도 95% 이상의 손실을 본 것이다.
남은 것은 결국 파동이 전해주는 교훈뿐이다. 윤씨처럼 허황된 꿈을 꾼 사람들, 유혹을 이기지 못한 대중들, 시장을 이용해 손쉽게 정치자금을 모으려 한 군인들, 모두가 그 대가를 치렀다. 이 점을 잊는다면 파동은 언제든 되풀이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5월 파동의 교훈이다. (6회는 '제2 파동과 첫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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