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노역'이 되살린 '유전무죄'의 씁쓸한 추억

머니투데이 머니투데이 법조팀(김만배·이하늘·이태성·김정주 기자) 2014.03.29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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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살롱<7>]지역에서 '한가닥'하는 유지들의 합작품…"법은 누구를 위해 있나"

편집자주 정치이슈부터 민생범죄까지…. 법원과 검찰에서는 하루에도 수천건에 달하는 법적공방이 이뤄진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그 배경과 법리적 근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법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이에 머니투데이 사회부 법조팀은 매주 화제가 된 법적 사건을 선정, 이를 풀어보고자 한다. 어떻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친절하게...

#최근 주말에 방영되는 한 드라마. 서울에서 근무하던 한 검사가 자신의 고향으로 발령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검사의 부임 이후 지역 유지인 사업가는 지속적으로 호의를 표시한다. 결국 상관인 부장검사는 의중도 묻지 않고 해당 검사와 사업가의 약속을 주선한다. 지역 사업가 및 지주와 고위 공무원의 유대관계가 드라마에서 공공연하게 서술되는 것은 여전히 지방 토호세력과 권력의 유착이 만연하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판, 항소심서 처벌 완화…향검은 항소도 안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자리잡은 '황제노역' 역시 이 같은 유착관계에서 시작됐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초단축 업무시간, 주말·공휴일도 업무시간에 포함되는 노역형은 일반인에게는 5만~10만원 선의 일당이 계산된다.

하지만 광주지역에서 시작한 대주기업의 창업자인 허재호 전 사장은 일당 5억원의 '꿀알바'가 가능했다. 이를 통해 벌금 254억원을 51일의 노역으로 끝낼 수 있게됐다.(물론 현재는 대검찰청이 형집행금지 조치를 통해 벌금환수에 나서 '황제노역'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 같은 국민 법 감정에 맞지 않은 법적과정은 2004년 도입된 '지역법관제'에서 유래됐다.

법관들이 수도권 근무를 선호하다보니 지방에 부임하는 법관들은 의무적으로 짧은 기간만을 근무하고, 다시 수도권 복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로 인해 인사이동이 잦아져 재판이 부실해지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지역법관제를 도입한 것.

◇지역법관제, 취지는 어디로? 유착 등 부작용만 도드라져


일면 '향판'(鄕判)이라는 용어로 더 익숙한 이 제도는 해당 법관들이 지역정보에 밝아 해당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처리하는데 더욱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다. 제도 도입 초기 기존에 명확치 않았던 사건들에 대한 법적조치가 정확하고 신속해졌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제도가 계속되면서 퇴임하지 않고 해당지역에 많게는 수십년간 머무는 법관들에 대한 지역 유지들의 유혹이 계속됐다. 법관들 역시 이들 유지와의 관계를 통해 수월한 사건처리가 가능해 양측의 필요에 의한 유착이 시작됐다.

실제로 허 회장의 경우, 항소심에서 노역으로 형을 대신하는 환형유치(換刑留置) 기간을 줄여 노역 일당을 5억원으로 높인 장병우 광주지법원장은 이 지역에서 29년간 재직했다.

범죄의 실체를 발겨야 하는 검찰 역시 허 회장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검찰은 1심에서 징역 5년에 벌금 1016억원을 구형하면서 재판부에 "허회장이 탈루한 세금을 모두 냈고, 기업 부담이 크다"며 벌금형에 대한 '선고유예'를 요청했다.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1심에 비해 줄었지만 검찰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검사 역시 전남·광주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순환근무 검찰도 '피치못한' 연고 발령 시 배당 신중해야

물론 검찰은 검사들에 대해 2년의 순환근무를 진행한다. 특히 출신지역 근무는 최대한 피한다. 자신의 고향 지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검사는 "검찰은 원칙적으로 연고지 근무를 배제하려 하지만 검사들의 수가 많다보니 피치 못하게 겹치는 경우도 있다"며 "학연·혈연 등을 고려해 사건을 배당하는 등 객관성을 두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처럼 지역유지와 연관된 사건 역시 고려했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광주지역에서는 허 전회장 일가의 경제·사회적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대주그룹은 광주지역의 대표기업 가운데 하나다. 특히 허 전회장의 아버지인 허진명씨는 광주지법에서 37년 근무한 판사다. 허 전회장의 동생은 판사들의 골프모임의 스폰서, 사위와 매제는 광주지역에서 근무하거나 현재 근무 중인 법조인이다.

이처럼 얽히고 설킨 관계 때문에 설령 금품제공 등 대가가 없었다 해도 허 전회장에 대해 우호적인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고위 판사를 지낸 한 변호사는 "지방에서는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에 법관들도 동화되기 쉽다"며 "허 전회장이 어려워지면 지역사회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法, 노역전환 하한기준안 마련…항판제도 개선에도 나서

이에 대법원은 28일 전국 수석부장 회의를 열고 벌금형의 노역전환 하한선을 뒤늦게 만들었다. 벌금 액수가 100억원 이상이면 최소한 900일 이상의 노역형으로 전환해야 한다.1억원 이상 5억원 미만 역시 300일 이상의 노역을 해야 한다.

아울러 이번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항판제도에 대한 수술에도 나선다. 이번 회의에서는 항판제도 폐지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아울러 지법부장, 고법부장, 법원장 보임 등을 일정 단계별로 의무적으로 타권역 순환근무토록 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대법원은 이번 논의사항을 기반으로 향후 향판제도의 폐해를 줄이고, 장점을 유지할 수 있는 포괄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향판·항검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지만 노역 중지과정에서도 여전히 광주지법은 허 전회장에 대한 '특혜'를 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비판속에서도 끝까지 진행된 허 전회장 '봐주기'

허 전 회장은 노역중단으로 석방되면서 교도소 내부에 들어온 개인 차량을 타고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일반 교도소 수감자들이 정문 경비초소를 통과해 출소하는 것과는 다른 절차다. 허 전회장의 언론노출 등을 피할 수 있도록 법원이 또다시 특별히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황제노역 논란이 커진 이후 허 전회장이 숨겨놓은 재산들이 실체가 하나 둘씩 발견되고 있다. 광주 지역의 건물 임대료 수익은 물론 고가의 미술품에 대한 정보도 속속 나오고 있다.

국세청 역시 별도의 부동산 재산을 찾아냈고, 허 전 회장이 장기간 체류한 뉴질랜드에 빼돌린 재산추징에도 나서고 있다. 물론 늦은 조치지만 지금이나마 '비정상의 정상화'에 관계당국이 나선 것은 환영할만하다.

허 전회장 역시 "벌금을 납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지금은 돈이 없고, 지인에 돈을 빌려 1~2년 안에 갚겠다"고 전했다.

이에 검찰은 28일 허 전회장을 다시 소환해 남은 벌금 224억원을 빠른 시일 안에 완납토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허 전회장이 곧바로 벌금을 납부한다 해도 검찰은 다시 비난의 화살을 맞을 위기에 처한다. 애초에 벌금형을 노역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벌금 납부 능력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없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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