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남자' 정몽주의 반전 매력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4.03.2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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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4. 정몽주··· 충신과 역신의 갈림길에서

'상남자' 정몽주의 반전 매력


"우리나라 역사인물 가운데 영화에 쓸 만한 사람 좀 없을까요?"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영화제작자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잠시 생각을 추스를 법도 한데 그날따라 한 인물이 뒤통수를 탁 치고 지나갔다. 바로 포은 정몽주였다. 영화는 관객의 통념을 살짝 배반해야 재미난다. 그런데 포은 이 양반, 가만 보면 반전매력이 넘친다.

1990년대 이후 학계를 중심으로 정도전이 재조명받자 정몽주의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정몽주 하면 흔히들 샌님 이미지를 떠올린다.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 역을 맡고 있는 배우도 그래서 임호다. 역대 최강 비주얼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좀 고지식하고 유약해 보인다. 그렇다면 실제 정몽주의 인간적 면모는 어땠을까?



역사인물 정몽주는 한 마디로 '상남자'였다. 그는 스승인 이색으로부터 '동방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을 만큼 학문에 뛰어났다. 하지만 포은은 샌님 스타일의 문신이 아니었다. 1372년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그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 다른 사신들은 파도에 휩쓸려 죽었지만 정몽주는 표류 13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와중에도 주원장의 서신을 물에 젖지 않도록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강인한 근성의 발로다.

정몽주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발 벗고 나섰다. 1384년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그는 직접 생일축하사절이 되어 주원장을 찾아갔다. 당시 황제는 고려에 몽니를 부리며 사신을 억류하는 한편 출병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목이 잘릴까봐 모두 꺼리는 길이었지만 포은은 용감하게 자원했다. 결국 그는 일촉즉발로 치닫던 국교를 회복한 것은 물론 미납한 세공까지 면제받는 개가를 올렸다.



이에 앞서 1377년에는 일본 규슈지방으로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기도 했다. 역시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임무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담대한 외교술로 규슈의 책임자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귀국 후에도 사재를 털어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 돈으로 이듬해 다시 일본 땅의 동포 수천 명을 귀향선에 태웠다. 포은을 향한 백성의 신망은 두터워졌다.

정몽주는 학식과 인품, 근성과 담력을 바탕으로 고려조정에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며 신진사대부의 리더로 떠올랐다. 게다가 백성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으니 이성계가 어찌 흠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몽주는 사실 변방의 무장 이성계가 중앙정계의 거물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되어준 인물이다. 1380년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의 곁에서 조전원수로 참전했으며 1389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흥국사 9공신의 일원이었다.

이제 역성혁명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상남자답게 대세를 거역하고 고려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키려 했다. 1392년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 사고를 당하자 그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 혁명세력을 탄핵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때까지도 이성계는 즉위를 망설이고 있었다. 정몽주는 그들만 떼어내면 이성계를 설득해서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정도전 이상으로 포은에 대한 이성계의 애정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정몽주는 이성계를 가마에 태워 개경으로 돌아온 이방원에게 목숨을 잃는다. 비록 '최후의 고려인'으로 죽었지만 포은은 조선 태종 1년(1401년) 영의정으로 추증되며 줄곧 충신으로 대접받았다. 반면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은 고종 때까지 역신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몽주가 조선에서, 그것도 이방원에 의해 충절의 아이콘으로 추켜세워진 데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다. 새 나라를 세울 때는 역신으로 처단했지만 나라를 지켜야 할 때는 충신으로 받들 수 있는 게 정치다. 신하와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면 무슨 일이든 못할까. 특히 아버지를 내쫓은 일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태종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포은은 중종 12년(1517년) 사림세력의 주도로 공자 사당인 문묘에 종사되며 조선 도학의 조종이자 만고의 충신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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