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를 보다가 '측천무후'가 떠오른 까닭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4.03.01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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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3. 기황후··· 공녀로 끌려가 제국을 틀어쥐다

'기황후'를 보다가 '측천무후'가 떠오른 까닭


드라마 ‘기황후’가 궁중암투를 본격적으로 그리면서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방영 초반만 해도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지며 적지 않은 눈총을 받았던 드라마다. 고려의 자주성을 침해한 기황후를 미화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배우들의 열연과 짜임새 있는 스토리 덕분에 역사왜곡 논란에도 불구, 시청자에게 어필했다.

역사인식은 어쩌면 시선의 문제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역사인물 중에는 착하기만 한 사람도,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알고 보면 대부분 착한 나쁜 놈, 혹은 나쁜 착한 놈이다. 기황후도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고 그 가족이 전횡을 일삼도록 한 치부가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역사인물로 기황후를 이야기하자면 또 한 명의 여걸이 떠오른다. 당나라 황실을 제압하고 여인의 치세를 열어젖힌 측천무후다. 측천무후는 14살 때 정5품 재인(才人)이 되어 황궁에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는 황후를 제외하고 후궁으로 4비(妃), 9빈(嬪), 27세부(世婦), 81어처(御妻)를 둘 수 있었다. 후궁만 121명이다. 품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비빈(妃嬪) 급이 아닌 이상 일반궁녀와 다를 바 없었다.

측천무후는 반짝 당태종의 눈에 들었다가 곧 총애를 잃고 궁녀들이 기거하는 좁은 방으로 내쳐졌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기는커녕 환관들의 환심을 사서 궁내 정보를 모으는 한편 궁중 학교인 내문학관에서 학문과 교양을 익힌다. 결국 측천무후는 내문학관 학사의 추천과 환관들의 도움으로 황제의 수행시녀가 되었다. 그녀는 당태종의 차를 끓이면서 제국의 통치술을 어깨 너머로 배운다. 황태자 이치(당고종)와의 은밀한 만남도 이때 이뤄졌다.



기황후 역시 공녀로 끌려가 황태자궁에서 원혜종과 인연을 맺었다. 목은 이색이 남긴 글에 따르면 당시 고려에서는 공녀로 뽑히면 목을 매어 죽거나 우물에 몸을 던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며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다짐한다. 기황후가 황태자의 눈에 띄는 곳에 배치된 데는 환관 고용보의 힘이 컸다. 측천무후같이 궁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담력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궁중암투도 마찬가지다. 측천무후는 당태종 사후 비구니가 되었다가 고종의 배려로 황궁에 돌아온다. 그녀는 숙비를 견제하려는 황후의 편에 서서 힘을 키웠다. 비빈의 반열에 오른 다음에는 자신의 어린 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워 황후마저 제거한다. 기황후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녀는 황후인 타나실리에게 채찍으로 얻어맞고 인두질을 당했다. 그러나 황후 일가는 얼마지 않아 드라마에서처럼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멸족을 당하고 만다.

측천무후는 공포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통치기간은 평화로운 치세였다. 측천무후는 문벌을 타파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다. 적인걸, 장간지, 요숭 등 명재상들이 그녀의 치세에 연이어 나왔다. 또 호구와 토지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했다. 황족이나 문벌귀족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였지만 백성 입장에서는 구세주였던 셈이다.


기황후도 이에 못지않다. 그녀는 권력을 쥔 귀족들에 맞서 고려와 몽골을 아우르는 신진세력을 규합했다. 공녀 출신인 그녀는 백성의 고통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대도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는 황실 곳간을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무려 10만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녀가 이민족임에도 제1황후에 봉해진 데는 민심도 한 몫 했다.

현재 중국 시안 근처에 있는 측천무후 능에는 커다란 ‘무자비(無字碑)’가 서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비석에 한 글자도 적지 말라는 유언을 내렸다. 우리나라 연천의 기황후 묘로 알려진 무덤에는 아예 비석과 석물이 없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질서가 공고한 시대에 동아시아에서 여성정치의 전범을 보여준 두 사람이다. 자신들에게 정당한 비문을 새겨줄 후예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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