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곡가들의 전령사 임현정, "난 메신저일뿐"

머니투데이 이언주 기자 2013.11.0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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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피아니스트 임현정 "연주자에게 '스타' '천재' 같은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아요"

피아니스트 임현정에게 연습은 어떤 식으로 했냐고 묻자 눈을 반짝거리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빈 레슨실 몰래 들어가서 연습하거나 친구 집에 가서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요. 새로운 피아노로 잠깐씩 연습하면 긴장도 되고 집중력이 높아져서 연습이 잘 되거든요. 너무너무 신나요!"  /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피아니스트 임현정에게 연습은 어떤 식으로 했냐고 묻자 눈을 반짝거리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빈 레슨실 몰래 들어가서 연습하거나 친구 집에 가서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요. 새로운 피아노로 잠깐씩 연습하면 긴장도 되고 집중력이 높아져서 연습이 잘 되거든요. 너무너무 신나요!" /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


"너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 예술가야. 나를 그냥 '앙리'라고 불러도 좋아. 너는 내 동료이고 자부심이니까."

14살 된 여자아이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5분간 침묵을 지키던 파리음악원의 앙리 바르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음악캠프에서 만난 바르다 교수를 찾아가 1년 남짓 혼자 연습했던 '리스트 소나타' 연주를 한번만 들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유튜브 연주 동영상으로 전 세계 클래식음악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EMI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을 녹음한 피아니스트 임현정(27). 그가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기 전 일이다.



바르다 교수는 "다른 곡을 칠 때와 리스트 소나타를 칠 때 전혀 다른 사람이던데, 어떤 모습이 진짜 임현정이니?"라고 물었다. 사연은 이렇다. 리스트 소나타에 흠뻑 반한 13살 임현정이 이 곡을 연습하고 싶다고 하자 당시 선생님이 16살은 돼야 칠 수 있다며 말렸다. 그런데 임현정은 당장 이 곡을 치지 않고는 안 되겠더란다. 밥도 못 먹겠고, 잠도 잘 수가 없는데 별 수 있나. 그 때부터 그의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학교생활은 해야 하고 시험도 봐야하니까 선생님이 시키는 것은 했죠. 대신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저만의 레퍼토리는 따로 개척해서 연습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곡은 레슨도 못 받고 그야말로 저 혼자 한 거죠. 이중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던지, 일부러 졸업도 빨리 했어요. 15살 때요."



입이 딱 벌어진다. 그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과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진짜 일을 둘 다 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결국 해냈다는 것. 이후 파리음악원 입학까지 약 2년간은 정기적인 레슨을 받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만난 바르다 교수는 임현정에게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저한테 음악적인 자유를 주신 분이에요. 저에게 앞으로는 무조건 하고 싶은 것만 하라고 하셨거든요. 혼자 연습하며 '과연 이게 맞는 걸까' 걱정하고 불안했던 제게 명쾌하게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죠. 어린 저를 '동료'라고 하셨을 땐 정말 충격이었고, 그때 진정한 예술을 해야겠다는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임현정의 음악인생에 중요한 사람이 또 있다. 세계적인 마이스트로 라비노비치다. 지휘자이자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그에게 임현정이 자신의 연주 녹음CD와 편지를 보내며 둘은 음악적으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파리음악원 졸업하면서 연주한 곡을 녹음해서 보냈어요. 답장은 기대도 안했죠. 그런데 작곡가들이 쓰는 정말 커다란 오선지 다섯 장에 저의 독주에 대한 깊은 생각과 분석을 일일이 손으로 적어 보내준 거에요. 논문에 달하는 수준이었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제가 14살쯤 처음으로 작곡한 저의 '오푸스 1'을 원본악보 그대로 보내면서 이것도 좀 봐달라고 했죠. 하하"

피아니스트 임현정 /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피아니스트 임현정 /사진제공=마스트미디어
명랑하고 당찬 소녀다. 이번에도 답장이 왔냐고 묻자 "그럼요,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였는데요, 쇼스타코비치가 생전에 그런 얘길 했대요. 작곡을 할 때는 반드시 볼펜으로 하라고요. 그런데 제가 당시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작곡을 했거든요. 그걸 보고 좋았다는 칭찬과 함께 답장이 왔어요."

현재 스위스에 거주하는 라비노비치는 다음 주에 한국을 방문한다.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머니투데이와 함께하는 피아니스트 임현정 초청 스타콘서트'에서 임현정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듣기 위해서다. 그는 연주 소식을 듣자 "너의 라흐마니노프를 꼭 듣고 싶다"며 주저하지 않고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는 임현정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에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어요. 절망, 희열, 영웅적인 것, 또 한국 사람들만 안다는 '한'(恨)이라는 정서까지요. 러시아인들은 그 사무치고 응어리진 감정을 아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때는 너무 편해요. 저를 막는 것 없이 자유롭게 하거든요."

그는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를 수 천 번에 걸쳐 듣고 있다. "어릴 때 꿈이 라흐마니노프를 치는 것이었는데, 지금 이걸 무대에서 연주한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에요. 이제는 가슴과 머리로 더 깊이 이해하게 됐으니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야기 하는 내내 작곡가에 대해 깊은 사랑과 존경, 또 음악에 대한 존중과 경외감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임현정은 자신에게 붙는 '스타'나 '천재'라는 수식어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작곡가이고 음악 자체죠. 연주할 때 제 모든 경험과 지식, 감수성을 다 바쳐 표현하되, 저는 작곡가와 청중 사이의 메신저일 뿐이거든요."

작곡가의 삶과 숨결, 음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철저하게 탐구하고 분석해서 오롯이 전달하겠다는 그의 진정성과 열정,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20대의 앳된 소녀가 아닌 위대한 작곡가들의 전령사가 되고 마는 임현정의 카리스마는 결코 지치지 않을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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