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까 걱정보다 무서운 건 못산다는 '낙인'

머니투데이 지영호 기자 2013.10.2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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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택, 맞춤형 주거복지시대 연다']<9-1>18년 양천아파트, 입주민 노령화에 시름

편집자주 박근혜정부가 서민주거안정의 핵심공약으로 내세운 '행복주택'이 딜레마에 빠졌다. 정부는 신혼부부와 대학생 등 사회활동이 왕성한 계층에게 교통이 편리한 도심에 임대주거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지난 5월 서울 등 수도권 도심내 철도부지, 유휴 국·공유지 등 7곳을 행복주택 시범지구로 지정하고 1만가구를 우선 공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류·가좌지구를 제외한 나머지 5곳은 지자체와 지역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연내 착공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머니투데이와 뉴스1은 행복주택이 국민적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사업인지 여부와 현안을 심층 분석하고 근본적 대안을 찾는 공동기획을 마련했다. 특히 맞춤형 주거복지시스템이 잘 갖춰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선진국의 사례를 살펴보기 위해 직접 현지를 찾아 정부, 지자체, 기관,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심층 취재했다.

신정기지 앞에서 본 양천아파트. 운행을 마친 열차가 아파트 하부로 진입하고 있다./사진=지영호 기자신정기지 앞에서 본 양천아파트. 운행을 마친 열차가 아파트 하부로 진입하고 있다./사진=지영호 기자


 ‘철도 위에 살면 소음이나 진동에 시달리지 않을까?’ 정부가 지난 6월 행복주택 시범지구 7곳과 함께 연내 1만가구를 우선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우려했던 반응이다.

 많게는 18년째 인공대지 위에 사는 양천구 신정동 양천아파트 주민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들은 ‘철도 위에 산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다’고 말한다. 가끔 철도 소음이 있긴 하지만 크게 거슬릴 수준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웃과의 단절’에 더 큰 고민이 있어보였다.



 평일 정오 지하철 2호선 양천구청역에 내려 지하철 공사 건물로 올라가니 철도 위에 솟은 양천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운행을 마치고 점검이 필요한 열차들이 가끔씩 아파트 밑으로 진입했다.

 양천아파트는 1995년 서울시가 양천구 신정동 신정차량기지 위에 22만1487㎡의 인공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지은 2998가구 규모의 공공임대아파트다. 부지매입비용을 아끼면서 임대주택 공급은 늘리는 아이디어에서 만들어졌다.



 인공대지 위에 지어진 아파트다보니 진입로는 가파르다. 4층 높이 수준에 올라야 대지가 시작된다. 대지 위에 오르면 철도 위에 지은 집이라는 생각이 사라진다. 단지 내 조경도 좋고 전체적으로 깨끗한 분위기다. 버스 정류장이 단지 내에 있는 점이 이채롭다.

 계획 초기 우려됐던 진동·소음 관련 민원은 완공되고 난 후 크게 줄었다. 현재 이 점을 문제삼는 주민들은 거의 없다. 7년째 이곳에 산다는 한모(78)씨는 “아침·저녁으로 소음이 있긴 하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라며 “오히려 목동7단지 주변의 항공기 소음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무너질까 걱정보다 무서운 건 못산다는 '낙인'
◇소음·진동보다 더 큰 고민 ‘입주민 노령화’


 주민들의 고민은 이곳의 노인인구 증가다. 주민자치회에 오랫동안 참여했다는 주민 이모씨(59)는 “젊은 사람들의 씨가 말라 아파트 행사를 가면 내가 막내”라며 씁쓸해 했다.

 SH공사는 이 같은 공공임대주택단지에 저소득층을 포함해 임시이주자, 철거민, 새터민 등을 우선 배정한다. 입주의 기회는 여러 계층에 열려있지만 임대아파트에 남는 계층은 새 집을 얻기에 힘에 부친 노년층에 집중돼 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단지 내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00명이 넘는다”면서 “젊은 사람들이 없다보니 다른 단지에 비해 활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임대아파트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SH공사의 공공임대 세대주 연령분포에 따르면 60대 이상이 2010년 말 39.6%에서 올해 9월30일 현재 43.2%로 늘어났다. 60대가 20,7%에서 22.3%으로 늘었고 70대 역시 13.8%에서 15.2%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30대는 9.0%에서 7.5%로, 40대는 19.6%에서 17.5%로 감소했다.

 임대아파트 단지의 노년층의 증가는 산업화로 인해 청년층의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나타난 것처럼 이곳은 외부의 불편한 시선과 편견으로 인해 젊은 층의 거주비율이 낮아졌다는 것이 SH공사의 해석이다.

100% 임대로 이뤄진 양천아파트(우)와 임대-민간분양이 섞인 목동2차 우성아파트(좌)가 어울려 있는 신정동 일대 아파트단지 전경.100% 임대로 이뤄진 양천아파트(우)와 임대-민간분양이 섞인 목동2차 우성아파트(좌)가 어울려 있는 신정동 일대 아파트단지 전경.
◇낙인효과 극복하려면 '자율적 커뮤니티' 활성화 해야

 자녀를 키우는 30~40대 부부에게 임대주택의 ‘낙인효과’는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다. 101동에 산다는 30대 학부모는 “학교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따돌림 당했다는 사례가 많아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 전에 모두들 떠난다”면서 “우리도 딸 아이가 입학하는 내후년 전에 이사할 예정인데 갈 곳이 마땅찮다”고 걱정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지적됐던 사안이다. 김용순 LH 토지주택연구원 부동산경제연구단장은 ‘철도·공공유휴 부지 등을 활용한 임대주택건설 국내외 사례 및 시사점’에서 “국내·외 사례로 볼 때 인공대지 위의 주택 거주자의 안전성·소음·진동으로 인한 불편도는 낮다”면서 “소형 임대주택으로 단지가 구성된다면 오히려 낙인효과와 슬럼화가 더 걱정스럽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 같은 문제는 양천아파트와 주변 민간아파트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봉사모임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단지 내 노인복지시설 봉사단으로 활동하는 정모씨(60)는 “자율방범대, 바르게살기 운동본부, 대한적십자사, 새마을 부녀회 등 봉사활동모임에 참여하면서 임대아파트 주민과 일반아파트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흔히 목격할 수 있었다”면서 “소득 차이는 크지만 행복의 차이는 크지 않다는 게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 단장은 “정부가 소득으로만 입주자를 정하지 않고 신혼부부나 대학생 등 다양한 계층을 담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행복주택 안착에 긍정적인 요소”라면서 “낙인효과를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문화 체육시설이나 주민 커뮤니티시설의 확충을 통한 지역 주민이 서로 융합할 수 있는 연계 프로젝트가 보강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에 대해 정부도 행복주택을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강화해 통상적인 임대주택과 차별화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주민편의시설이나 체육시설 등을 복합적으로 가미하면 주민 호응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사회적 기업유치를 통해 거주민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커뮤니티센터 등을 도입해 지역 화합 및 소통의 장소로 활용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방향”이라며 “특히 보육시설을 갖춰 사회초년생이나 맞벌이 부부가 사회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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