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뭐길래" 40대 차장, 하루 4시간씩 자며…

머니투데이 서명훈 기자 2013.05.0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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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딩블루스]<5>해외주재원 경력 임원·어학연수 경험 부하, 그 사이에서…

일러스트=김현정일러스트=김현정


대기업에 다니는 K모 차장은 요즘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투 잡(Two Job)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뒤늦게 고시 전선에 뛰어든 것도 아니다. 그를 하루에 4시간도 채 못 자게 만드는 주범은?

바로 ‘영어’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만해도 해외연수를 다녀오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어요. 입사할 때 토플이나 토익 성적표를 내긴 했지만 워낙 시험에 단련이 돼 있어서 점수는 잘 받았죠. 그렇다고 외국인하고 프리 토킹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K차장은 올해로 41살. 91학번인 그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해도 캠퍼스에는 아직 이념투쟁이 남아 있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이나 해외로 나가는 대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다보니 어학연수는 언감생심, 사치에 가까웠다.

“익스큐즈 미, 캔 아이(Excuse me, Can I)…, 야 김 대리 전화 좀 받아 봐.”
K차장은 오늘도 외국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후배 직원에게 돌려줬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전화를 받은 김 대리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하다. 한참을 얘기하지만 그가 또렷하게 알아들은 말은 ‘리얼리(Really)?, 헤이 맨(Hey, man)’ 정도. 대충은 이해를 했지만 자신은 없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해도 회사에서 영어를 쓸 일이 별로 없었다. 해외 영업부서 외에는 영어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가 커지면서 국내 매출보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아졌고 회사 내부 문서를 영어로 작성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해외 영업부서가 아닌데도 외국인이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른 회사로 옮기기에는 이제 나이가 많은 것 같고, 지금까지 쌓아온 것도 아깝다. 부장으로 승진하고 임원도 되고 싶은데 윗사람 입장에서 외국인 만나서 제대로 대화도 못하는 저보다 후배들이 더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K 차장이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출근 전에 영어 학원을 다니는 이유다.


임원 승진을 앞둔 S 부장도 영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회사가 요구하는 영어 성적표를 제출하거나 영어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일상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상상 이상이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임원은 해외 주재원 생활을 오래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가끔 부하직원들과 영어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사무실이 웃음바다가 될 때 혼자만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가 된다.

“예전에는 해외 주재원 가운데서도 영어를 잘하는 직원이 많지 않았어요. 일단 나가서 배우면서 일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영어 잘하는 후배들이 하도 많으니 회사에서도 영어 잘하는 직원을 주재원으로 내보내려고 하네요...”

말꼬리를 흐리는 S부장은 자신을 ‘영어 샌드위치’라고 말한다. 해외 나가서 영어를 배워온 윗사람과 입사할 때부터 영어에 능통한 후배 직원들 사이에 스트레스 쌓이는 '낀 세대'라는 뜻이다.

“주중에는 야근 아니면 회식이라 늦고, 주말에는 영어학원 다니고... 정말 애들 얼굴 볼 시간조차 없어요. 결혼이 늦어 막내가 아직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어린이날에도 제대로 놀아주지 못하고...”

S부장은 다른 건 몰라도 영어교육만큼은 직접 챙긴다. 자신이 겪은 서러움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이유 때문이다. 자신과 아이들이 영어학원에 갖다 바치는 돈이 월급의 1/3 가까이 되지만 '영어 샌드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용카드를 긁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문득 이런 의문이 뇌리를 스쳐간다. '40대 중년 남자가 하루에 4시간 밖에 못자는 데, 업무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을까. 정말 똑똑한 경영자라면 영어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편이 조직의 효율성이 더 높아진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

직원 모두가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업무보다 영어를 챙기는 한국 기업들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S부장. 하지만 그는 어린이날 새벽부터 영어책을 집어 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흠칫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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