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6억 환원'보다 듣고 싶은 말은…

머니투데이 김준형 산업1부장 2012.12.0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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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박근혜, '6억 환원'보다 듣고 싶은 말은…


"힘 있는 사람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고 돈을 냈다"
1988년 5공 청문회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불법 정치자금을 내야 했던 처지를 토로한 말이다.

기업인들이 전적으로 '피해자'였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권력자의 의중을 읽지 않으면 한칼에 회사가 날아갈 수 있는 시대의 '갑을' 역학관계상 기업인들의 운신폭은 상대적으로 좁았다.



정치권력의 권위주의 정도가 심할수록 기업인들은 최고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유혈쿠데타와 5.18 진압으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말처럼 무슨 경을 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두환의 전임자인 박정희 시대는 어땠을까.
아마도 그의 생전에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었던 건, 대통령을 넘어 '가부장' 수준이 돼 버린 절대권력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의 금고를 포함, 전임자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전두환 군사 정권 역시 전임자의 과거를 끄집어 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박근혜 후보가 4일 있었던 대선 토론에서 '그 금고'에서 나온 6억원을 전두환에게서 받지 않았냐는 기습적인 질문을 받았다. 박후보의 답은 "경황없이 받았고, 나중에 다 사회에 환원할 것"이었다.

6억원이 현재 가치로 따져서 수십 억원이 될지 300억원이 될지 계산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용돈' 수준이 아닌 건 분명하다(당시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가 김재규를 '부정축재자'로 규정, 강제로 환수한 재산이 10억원 정도였다).

그 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대통령이 월급을 알뜰살뜰 쌓아두었을 걸로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고, 정부예산에서 천문학적인 판공비로 지급된 항목도 없으니, 당연히 그 돈은 주로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비자금'일 수밖에 없다.
쌍용그룹 창업자이자, 공화당 초기 재정위원장으로서 정치자금 모집을 맡았던 박정희의 '동지' 김석원 같은 사람마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콧수염을 뽑히고 쫓겨나던 시절이었다. 기업 한 두개 공중분해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였으니 기업들이 돈을 내더라도 '뒷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실제로 박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했던 김정렴은 26개 기업에 추석과 연말에 정기적으로 '자발적으로' 1000만원에서 1억원씩을 받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회고록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김정렴은 박대통령이 개별 사안에 대해 대가 있는 돈은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쓴 대목이지만, 대통령이 기업인에게 직접 돈을 받았다는 걸 회고록에서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 정도로 당시 권력의 기업인 수탈은 공공연했고 도덕의식은 마비상태였다.

이런 종류 검은 돈의 대가성이 '포괄적'이라는 건 상식이다. 안냈을 때의 보복과 냈을 때의 배려가 전제되지 않는 정치자금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거다. 정치자금이 공공연히 오가는 시스템에서 공정한 경쟁, 요즘 말로 '경제민주'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6억원'의 질문을 받았을 때 박후보의 답변이 '사회 환원'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대통령후보로서 '경제민주화'를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들고 나온 터라 더더욱 그렇다.
'경제민주화'의 본질이 경제력 집중에 대한 국민의 감정적 반발이라면, '6억원'은 바로 그 경제력 집중의 한 요인이 된 정경유착을 상징하는 돈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업인들은 '체질적으로' 진보적 인사의 당선을 우려한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권위주의 시대의 권력-기업 관계가 다시 고개를 들지 않을까 하는데 대한 우려도 못지않게 크다.

실제로 불길한 전조도 발견된다. 이미 민영화된 포스코같은 기업을 '전리품'정도로 생각한 현 정부의 실세들이 회장 선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잡음이 불거진 게 대표적이다. 벌써부터 포스코 주변엔 정치권에 줄을 댄 인사들이 들끓으며 선거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오죽하면 사석에서 포스코 사람들이 "제발 일만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소연할까.

박근혜 후보는 인혁당 사건과 같은 불행한 정치사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넘기고자 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다.
6억원이 상징하고 있는 불행한 경제사를 '사회 환원'으로 풀 수 있다는 인식은 '인혁당' 못지않게 우려되는 대목이다.
'아버지 박정희가 남겨준 용돈'이 아니라 '대통령 박정희가 모아둔 부끄러운 돈'이었음을 냉정히 인식하고, 앞으로는 이 같은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게 '경제민주화' 공약에 어울리는 것이다.

과거의 6억원에 집착하자는 말이 아니다.
6억원을 국고로 돌려준들, 그걸 현재가치로 따져 수십 수백 억원을 토해낸들, 그래서 '생활인 박근혜'가 서민으로 돌아간들, 그게 국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통령 후보' 박근혜가 국민과 기업인에게 주는 약속은 6억원의 사회 환원보다 훨씬 크고 본질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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