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에서 '기억의 습작'이 사라진다면…

머니투데이 박창욱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2012.04.0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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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에세이]형편나은 음저협, 열악한 영화계 현실 봐줄 순 없는지

#.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거장 차이밍량. 그의 94년작 '애정만세'는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이 영화는 특이하다. 음악이 전혀 없다. 도시의 스산한 효과음 뿐이다.

음악이 빠지자 영화가 그리는 현대 도시인의 고독과 상실감은 화면에 더 짙게 배어든다.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영화의 완성도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 최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음저협)과 영화계가 영화음악 사용료 문제로 큰 갈등을 빚었다. 음저협은 영화에 음악을 사용할 때 기존에 징수하던 복제 사용료와 별도로 상영할 때마다 공연 사용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화부는 이 주장을 일부 수용해 지난달 15일 공연료 징수규정 개정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영화 제작사는 영화음악과 관련해 공연 사용료로 입장료 수입에서 한 곡당 극장요금의 0.06%를 음저협에 추가로 내야 한다. 그러나 영화계는 음악사용에 따른 부담이 크게 늘어 영화제작 자체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며 크게 반발했다. 최근 흥행작 '건축학개론'은 만든 제작사 대표도 추가 비용 부담이 커진다면 '기억의 습작'을 아예 영화음악에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건축학개론'에서 '기억의 습작'이 사라진다면…


#. 문화부는 고심 끝에 양쪽의 입장을 모두 반영한 중재안을 내놓고 갈등 봉합에 나섰다. 음저협에 대한 행정지도를 통해 영화에 음악을 사용할 때 복제와 공연(영화상영)에 관한 이용허락을 포괄적으로 받을 것인지, 아니면 분리해서 받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영화제작자가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규정에 저작권의 종류를 다 보장하되, 영화계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해 제작자가 작품내용이나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음저협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며 반발하는 상황인데, 독점적으로 저작권의 신탁관리를 하는 입장에서 문화부의 중재안을 정면으로 거슬러 극단적 행동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해외 영화제 수상 등으로 대외 이미지는 높아졌지만, 할리우드 거대자본과 맞서고 있는 국내 영화산업은 아직도 전반적으로 열악하다. 특히 투자사와 배급사의 하부에 속한 제작사는 정말 형편이 어렵다.


음저협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을 대상으로 소송 등을 통해 어떻게든 공연사용료를 받아내겠다는 입장이지만, 결국 그 부담은 영화계의 하부구조인 제작 현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대기업들은 극장에선 돈을 벌지만, 투자 분야까지 감안하면 영화산업 분야에선 아직 누적 적자를 면치 못하는 현실이다. 비유를 하자면 프로야구와 비슷하다. 그 자체론 아직 돈이 안 되지만, 콘텐츠 확보와 다른 사업과 시너지 및 미래 전망 등을 위해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 반면, 음저협은 이른바 '앉아서 돈을 버는' 단체다. 물론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치열한 '창작의 고통'을 거쳐 노래를 만들지만, 그 이후엔 그야말로 돈이 쏟아져 들어온다. 노래방에서 노래 한 곡 부를 때마다, 공연장에 한번 틀 때마다 정해진 돈을 꼬박꼬박 받는다.

음저협은 지난해 14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내부적으로 올해 2000억원을 목표로 잡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돈이 흘러넘치다보니 국정감사에서도 음저협의 이런 저런 비리 의혹이 질타를 당했고, 이후 얼마나 시정이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다수의 전문가에 따르면 대부분 음악가들의 주 수익원은 가요이지 영화음악이 아니다. 영화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이의 비율이 높지 않다는 거다. 영화음악 분야는 음악가들에게 주업이 아닌 부업인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계 전반이 좀 더 성장해 경쟁력과 수익성을 갖출 때까지,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음저협이 좀 더 기다려 줄 수는 없는 걸까. 눈앞의 이익 때문에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갈택이어'(竭澤而漁)의 고사가 떠오르는 상황이다. 고기 몇 마리 잡자고 연못의 물을 다 퍼내진 말자는 얘기다.

세계 영화를 지배하는, '저작권의 천국'인 미국이 왜 극장에다 공연사용료를 받는 걸 금지하는지, 그 이유를 음저협이 다시 한 번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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