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 깜빡이 켜고 부산까지 가려나

더벨 강종구 기자, 한희연 기자 2010.10.1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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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K Watch]

더벨|이 기사는 10월14일(19:31) 머니투데이가 만든 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한 남자가 운전을 가르쳐 준다며 한 여자를 운전석에 앉혔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자는 운전을 못해도 너무 못했다. 깜빡이를 켜지만 핸들을 돌리지 못한다. 수없이 많은 우회전을 그냥 지나친다. 직진만 할 줄 아는 차는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결국 부산까지 가고야 만다.



10월 금융통화위원회를 지켜 본 한 기자는 2000년대 초 큰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세친구'의 에피소드가 떠오른 모양이다. 김중수 총재의 기자간담회가 끝나고 농담처럼 한마디 던진다. "끼어들기 못해서 부산까지 갈 수도 있는데…"

애널리스트의 시황 리포트에도 같은 에피소드가 인용됐다. "8월 이후 꾸준히 한국은행 총재의 깜빡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회전 깜빡이를 넣고 계속 직진만 하다가 부산까지 갈 분위기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등 시장은 시그널과 다른 한국은행 총재의 행동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는 모습임"



◇ "깜빡이 켠 채 교차로를 세 번 지났다"

한국은행이 지난 10여년 동안 지금처럼 무시당한 적이 있을까. 지금 한국은행은 우측 깜빡이를 켠 채 직진하는 자동차 취급을 당하고 있다.

7월 첫 기준금리 인상 이후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기조는 '금리 정상화'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금리를 정상 수준으로 올려놓겠다고 선언한 지 넉 달째다. 어느 기자가 질문한 것처럼 우회전할 곳을 세 번째 지나쳤다. 그래도 깜빡이를 믿어줘야 하는 걸까.


물론 매달 금통위마다 금리를 올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통화정책의 기조 못지않게 타이밍도 중요하다. 그러나 타이밍이 너무 늦으면 기조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14일 기준금리를 또 한 번 동결한 김중수 총재는 기조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 언젠가는 우회전을 할 텐데 지금은 타이밍이 아닐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귀담아 듣는 시장참여자는 거의 없다. (통화정책 방향이 인상 쪽이라는) 마음은 믿지만, (실제로 인상을 할) 용기를 믿지 못한다. 용기 없는 정책당국이 무서울 리 없고 무섭지 않은 정책이 효과를 낼 리 없다.

금통위가 열리기 이전 채권시장에서는 '거품론'이 불거졌다. 채권금리가 지나치게 내려가는 것 아니냐는 자성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만약 기준금리를 올렸다면 "한국은행은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 trinity impossible, 환율이냐 물가냐

석 달동안 기준금리를 동결한 가장 큰 배경은 역시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이다. 사실 8~9월에는 크게 표면화된 리스크가 아니었다. 시장에서는 금리를 올리는 데 지장이 없는 작은 돌뿌리 정도로 봤다. 그러나 금통위는 그렇지 않았다. 통화정책에 대한 시장과 당국의 불협화음이 시작된 것은 그 지점이다.

그런데 10월 들어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은 김중수 총재의 표현대로 '절박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선진국과 신흥시장국간 환율전쟁에 휘말리며 달러/원 환율이 급락하고 있다. 성명서에 "앞으로 주요국 경기 및 환율의 변동성 확대 등이 세계경제의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문장을 추가한 것은 금통위가 느끼는 절박함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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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수 총재는 "환율을 보았습니다만 환율 하나만 보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답변을 했지만, 환율이 이번 금통위의 최대 변수였음을 금융시장에서 모를 리 없다.

김중수 총재가 로버트 먼델 컬럼비아대 교수의 '임파서블 트리니티(Impossible Trinity)'를 언급한 것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잠시 물가를 버리고 환율을 선택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임파서블 트리니티, 그러니까 다 같이 얻을 수 없는 세 개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통화의 독립성이나 효과성이고 또 하나가 환율의 변동성이고 또 하나가 자본시장의 개방 이 세 가지입니다. 만일에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또 통화가 독립적으로 운용되는데 예를 들어서 옛날처럼 고정환율제를 갖는다 이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본다 그러면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이런 변수들 간에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환율의 안정은 우리나라에 있어 현실의 문제다. 대외의존도가 높고 위기 이후 경기회복을 이끈 것도 수출이다. 수출이 감소할 때 충격을 완화할 쿠션이 충분한지 아무도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최근 환율의 가파른 하락은 충분히 절박감을 줄 수 있다. G20 의장국인데다 일본 재무상마저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비판하고 나선 마당이라 이래저래 눈치를 봐야 할 입장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해 환율 하락에 기름을 붓는 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길 수 밖에…

결과적으로 한국은행의 '금리 정상화' 외침은 허언(虛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장의 불확실성에 대응하기도 급급한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김중수 총재의 말처럼 대외 불확실성은 경기에 하방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최소한 단기적으로 환율은 하락 압력을 받을 것이고 수출은 둔화될 우려가 있다. 환율이 하락하면 인플레 압력은 다소 약화될 것이다. 경기가 좋고 인플레 압력이 커질 때도 주저했던 금리인상을 한은이 과감하게 선택할 것이란 예상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런데 환율전쟁의 기저에 깔린 근본 원인이 세계 경제의 불균형(global imbalance)라고 본다면 대외 불확실성은 조기에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환율 전쟁이 무역전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다행히 미국과 중국이 극적으로 화해해 환율전쟁이 종식되고 G20에서 선진국과 신흥국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해법을 도출해 낸다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재개할 기회는 빨리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갈등이 오히려 증폭되고 그로 인해 경기 하방압력이 더욱 거세진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금리를 올리지는 않을 것이고, 미리 올려놓지 않았으니 내릴 금리도 없을 텐데 말이다. 어떤 상황이든 한국은행은 '선제적으로' 내놓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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