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정산소종'의 탄생

김인민 사루비아다방 대표 2010.07.24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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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에코라이프/실패의 미학

요즘 즐겨 마시는 차가, 알코올 없는 몰트위스키, '정산소종(正山小種)'이다. 술 좋아하는 내가 낮에도 맨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요 '정산소종' 때문이다.

홍차는 들어봤어도 정산소종은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이 차가 세계 최초의 홍차이니, 정산소종이 홍차요, 홍차가 곧 정산소종에 다름 아니다.



정산소종은 우리의 김치나 삭힌 홍어, 된장을 비롯해 치즈, 요구르트, 와인과 같은 음식처럼 우연한 실수에서 발견한 식품 중 한 가지다. 꽤 믿을만한 기록에 따르면 중국 청나라 초기에 군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차농들은 따놓은 찻잎을 그대로 놔둔 채 산으로 피신했는데, 얼마 후 돌아와 보니 찻잎이 벌겋게 발효돼 있었다는 것이다.

생계가 막막해 상심한 차농들은 소나무를 태워 발효된 찻잎을 건조시켰고 이를 헐값에 팔아넘겼는데, 이 검게 발효된 훈연향을 품은 차가 큰 인기를 끌면서 정산소종, 즉 홍차의 역사는 시작됐다는 것이다.



홍차인 정산소종이 그러하듯, 자연이 스스로 숙성시킨 발효음식들의 탄생은 언제나 매우 극적이다. 차만을 두고 말하자면 보이차(흑차류)나 오룡차(청차류), 황차가 그렇다. 사실 차(녹차)의 탄생 혹은 발견 자체가 또한 극적이지 않았던가.
홍차 '정산소종'의 탄생


흥미로운 건 근대 이후에는 이런 차들, 더 나아가 김치라든가 치즈, 와인과 같은 인류의 음식문화를 대번에 바꿔버린 획기적인 식품들이 발견되거나 만들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차로 말하자면, 기껏해야 서로 다른 품종의 두 차나무를 이종교배하거나 발효를 좀 더 길게 하거나 짧게 하는 제조방식의 다양성, 차에 꽃이나 향을 입히는 기술, 0..05%의 찻잎으로 만든 병 음료가 발견이라면 발견일 테다.

왜 그럴까? 어쩌면 정산소종이 탄생할 수 있었던 조건들(그 우연성이 개입할 수 있었던 지점들)은 지리, 사회, 역사적으로 다종다양할 테지만, 역설적이게도 근대화된 식품 검역/관리 시스템이 부재했기에 가능했던 '사건'은 아니었을까?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부패해버린(부패했다고 믿는) 찻잎을 팔아치운 차농들은 지금의 식품위생관리법에 걸려 모두 쇠고랑을 차고, '불만제로'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을지도 모를 일. 너무도 깔끔하고 말쑥하게 관리되는 세상,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우연성이 배제되고 통제되는 세상은 이제 좀 답답하다.


그것이 식품이든 사람이든 부패를 단지 썩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실패를 단지 끝으로 간주하지 않는 조금은 느슨하거나 조금은 관대한 세상을 상상하면서 때때로 실패하는 내가, 부패한 정산소종을 요즘 즐겨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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