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A그룹의 비애

머니투데이 성화용 부국장대우 시장총괄부장 2010.06.22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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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그룹 계열사 CEO가 잘렸다. 대표이사가 된지 얼마 안됐다. 앞서 그 그룹에서 몸을 뺀 몇몇 후배들은 그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꽃다발을 들고 나왔다. 농반진반 '축하인사'가 오갔다.

마음고생 심했을텐데, 이젠 뒤돌아보지 말라는 충고도 나왔다. 당사자 역시 예상했던 퇴직인지라, 큰 충격 없이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 동료 CEO들 중에도 1년이 안돼 잘린 사람이 여럿이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터였다.



비슷하게 잘렸거나 스스로 물러난 '사장'들이 몇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통점은 대부분의 경우 그 사유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퇴직자들이 멀쩡하게 다른 일을 구하고 시장에서 평판도 나쁘지 않은 걸 보면 무능력이나 부정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상식 밖의 축출을 당했다는 게 대기업의 생리에 비춰 이례적이다.

결국 자른 자와 잘린 자 만이 알고 있는 내밀한 갈등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종합해 재구성해보면 A그룹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대입할 만한 키워드가 '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업 포트폴리오가 매우 안정적인 A그룹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아 수백억원, 또는 수천억원의 손실을 입게 된다. 여기서 '오너'는 모난 시각으로 '종업원'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내 돈을 빨아먹고 살면서 불성실하고 무기력하게 밥만 축내고 있다는 분노가 그를 지배한다. 동시에 그 화가 의심으로 바뀐다. 접근해 오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으로 보인다. 내 부(富)를 편취하려는 자들, 기생하려는 자들, 그저 하는 일 없이 입만 놀려 돈을 타내려는 자들.

오너는 점차 사람들과 만나는 걸 피한다. 총기에 가려있던 폐쇄적인 성향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오너가 그나마 속을 보이는 사람은 극소수. '입안의 혀' 처럼 순종적이며, 실수를 감추는데 능숙하고, 오너의 성향에 철저히 부응하는 심복이다.

이 때부터 이 심복들의 전횡이 시작된다. 한 때 오너와 터놓고 지냈던 유능하고 현명한 경영자가 스스로 떠나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오너와도, 심복과도 코드를 맞추지 못한 채 남아있는 어정쩡한 경영진들은 차례 차례 잘릴 수 밖에 없다. 어떤 말을 해도 오너는 귀를 막고 있다. 때로 소통의 채널이 열릴 법 하면 심복이 재빨리 가로막는다.


이쯤 되면 A그룹이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 회사'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아닐까, 한번쯤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A그룹은 기업으로서의 '범례'이며, 동시에 '실례'이다. 오너는 현재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역사 속에 수없이 등장해 개념적 추상으로 굳어진 인물 유형이기도 하다.

A그룹은 여전히 돈을 잘 번다. '시황'을 우군으로 삼아 연간 수천억원의 경상이익을 내는 캐시카우 사업을 가지고 있다. 심복들은 자신감에 넘쳐 있다. 사람들을 솎아내 불화를 줄이는 게 오너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며, 그 이후 얼마든지 기업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와중에 월급쟁이 경영자는 떠나거나 잘리고 직원들은 임원 승진을 두려워 한다. 남은 사람들은 오너를 포위한 친위그룹의 일원이 되기 위해, 또는 그들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영혼의 고단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A그룹들은 지금 어디 서 있나. A그룹은 10년 후 쯤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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