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시아나그룹, 어떻게 달려왔나

머니투데이 기성훈 기자 2009.12.30 15:06
글자크기
금호아시아나 (9,770원 ▲280 +2.95%)그룹은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이 1946년 4월 7일 자본금 17만 원으로 미국산 중고택시 두 대를 사들여 광주택시를 설립한 것이 모태다.

1948년 금호고속(당시 광주여객)을 설립,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어 금호타이어(1960)와 금호석유화학(1970) 등을 잇달아 설립, 1973년 6개사로 그룹체제를 출범시켰다.



1988년 장남인 박성용 명예회장이 항공업에 진출, 그룹의 다른 한 축을 항공물류분야로 확대했다. 금호타이어와 금호고속도 중국시장에 진출하며 글로벌 항공, 물류, 화학 회사로서 입지를 다졌다.

금호그룹은 박삼구 전 회장이 지난 2002년 9월 취임한 후 신성장 동력 발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확장 경영이 시작됐다. 박 회장은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손에 넣었다.



재계 10위권을 맴돌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계열사로 편입하면서 자산규모가 26조원, 계열사 52개사를 거느린 재계 8위 그룹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M&A로 몸집을 키운 금호그룹은 과다차입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돼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건설 인수에 필요한 6조400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무적 투자자(FI)들과 맺은 풋백옵션(금융자산을 약정된 기일과 가격에 매각자에 되팔 수 있는 권리)이 문제가 됐다.


당시 금호그룹이 FI들에게 제시한 대우건설 주가는 3만1500원.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대우건설 주가하락으로 금호 측이 지불해야 할 옵션 비용만 4조원대에 달한다.

자금난이 악화되자 대우건설, 금호생명 등 주력 계열사까지 모두 시장에 내놨으나 경기 침체가 가속화하면서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자구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결국 금호아시아나는 주력 계열사인 금호산업, 금호타이어 등에 대한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박삼구·찬구 형제 간에 갈등을 빚으면서 경영권 다툼마저 벌어졌다. 결국 박삼구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형제 경영은 박삼구 전 회장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됐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