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 윤석금과 '청년' 이명박

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 대표컨설턴트 2009.11.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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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에세이]데모하다 잘린 서울대 출신 채용

'세일즈맨' 윤석금과 '청년' 이명박


세일즈는 에스키모인에게 냉장고와 에어컨을, 적도의 아프리카에서 난로를 파는 일이다. 그만큼 발상의 전환과 열정과 끈기가 요구된다.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은 세일즈로 일어선 2세대 창업CEO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의 지적은 적절하다.

"1980년대 초부터 재벌그룹들이 모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척박한 창업토양에서 기적같이 2세대 창업신화를 이뤄낸 CEO가 바로 윤석금이다. 모험심과 결단, 지칠 줄 모르는 실천력 등은 윤석금과 정주영, 이병철과 같은 1세대 창업자와 닮았다. 그러나 윤석금은 1세대 창업자들과 확연히 다르다. 윤 회장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윤리경영과 투명경영을 원칙으로 지켜왔다."



사실상 윤 회장은 치열한 레드오션 출판업에서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레드오션 속에서 블루오션을 만들어 나갔다. 발상의 전환, 창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0년대 그는 영문으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이었다.

돈 푼께나 씀직한 중소기업 사장들에게 그 백과사전은 거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세계 판매왕에게 주는 벤튼상을 수상했다. 에스키모인들에게 에어컨을 수없이 팔았기 때문이다.



◇레드오션 속에서 블루오션 만드는 창조

1980년, 7명의 사원으로 출판사를 차렸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은 성실하기만 하면 되는 단순노동의 결과물이 아니다. 중소기업에 인재가 모일 리 없었다. 그는 70년대 데모를 하다가 제적을 당했거나 퇴학을 당한 일류대학 출신들을 채용했다.

당시 '운동권'은 취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엄혹한 군사독재 상황을 윤 회장은 기회로 만들었다. 1980년대 웅진출판사는 위인전기로 대박을 터트렸다. 1800만 여부 판매를 이뤘다. 이게 바로 실용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고록 '신화는 없다'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6·3 데모로 '내란 선동죄'라는 전과 때문에 취직이 불가능했다. 청년 이명박은 당시 중소기업 현대건설 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그는 정면으로 부딪쳐 나갔다. 편지를 썼다. 수신은 대통령 박정희였다.

그는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토로한 뒤 사회에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당시 민정담당 이낙선 비서관은 국영기업체 취직이나 해외유학 등으로 회유했다. 하지만 이명박은 그런 비굴한 당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 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히 빚을 지는 것입니다."

◇'신(信)'을 지키면서 난관을 극복해야

IMF로 소비시장이 얼어붙었다. 웅진의 정수기 판매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윤 회장은 세계 최초로 정수기 렌탈제를 도입했다. "팔 수 없으면 빌려주라!"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러면서도 사람과의 약속을 중히 여겼다. 신(信)은 바로 사람(人)의 말(言)이기 때문이다.

윤 회장과 코리아나의 유상옥 회장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재력이 있는 윤 회장이 자금을 더 내는 식으로 1988년 공동출자해서 코리아나 화장품을 창업 했다. 경영은 전적으로 유 회장에게 맡겼다.

웅진은 IMF 위기 때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자금 마련을 위해 우량기업으로 성장한 코리아나 지분을 유 회장에게 매각했다. 이는 보기 드문 성공적인 동업사례다. 또 윤 회장이 코리아나를 유 회장에게 매각하면서 향후 10년간은 웅진이 화장품 시장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0년이란 보너스'를 준 셈이다. 2009년 10년이 됐다. 웅진은 한국 내 화장품 진출을 선언했다. 이로써 윤 회장과 유 회장이 '선의의 경쟁자'로 다시 만나게 됐다. 멋진 경쟁을 기대한다. 비즈니스 세계의 신(信)이 이럴진대 무엇보다 약속과 말이 중요한 정치판은 어떤가. 국민과 철석같이 ‘약속’한 ‘세종시’를 어떻게 풀어낼지 자못 염려스럽다. (한국CEO연구포럼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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