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병칼럼]한국사회 소통의 비극

머니투데이 강호병 증권부장 2009.06.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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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병칼럼]한국사회 소통의 비극


머니투데이가 15일 창간 8주년을 맞아 개최한 조찬강연회에서 연사로 초청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소통하는 당국자'를 자처했다. 강연 후 질의응답시간에 예상대로(?) 질문이 없자 즉석에서 사회자를 자청해 참석한 인사 몇 명을 지정하며 현안과 정책과제를 듣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소통문화에 대한 화두도 꺼냈다. "옛날에는 선생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을 예의로 알았고, 침묵은 금이라는 말도 있다"며 "하지만 21세기엔 `침묵은 바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윤 장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언한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완곡어법'을 사용했다. 자리의 성격을 의식해서 그랬을 텐데 좀더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정책 고언들이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윤 장관의 진행을 보면서 미국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에서 의사소통문화와 비행기 추락사고간 상관관계를 서술한 대목이 떠올랐다. 97년 괌 니미츠힐에서 추락한 대한항공 801편의 에피소드도 실린 이 대목에서 글래드웰은 궂은 날씨, 조종사 피로 이상으로 조종실의 신속정확한 의사소통 부재가 비행기 추락사고의 원인이라고 적었다.

기장이 전권을 쥐고 지배하는 무거운 조종실 분위기에서 부기장 등 하급자들이 비행기 추락요인을 발견했으면서도 기장의 기분을 고려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두루뭉수리하게 힌트를 주듯 둘러 이야기한 것이 위기 때 즉각 대응하지 못하게 한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평소 상급자 기분을 고려해 완곡히 말하는 교신방법이 절체절명의 위기 때도 투영된 문화적 현상으로 분석됐다.



 대한항공 801편의 경우 새벽에 악천후를 뚫고 괌 공항에 접근했는데 예상과 달리 활주로가 보이지 않았다. 책에는 운명의 몇 초간 '활주로가 안보인다. 올라갑시다'를 부기장, 기관사가 모두 3회 권유한 후에나 기장이 기체상승 명령을 내렸다. 물론 시간이 늦었다.

그외 추락한 항공기도 연료 부족이나 플랩 동결 등 추락사유는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를 안은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됐다. 대한항공은 이 일이 있은 후 조종실 소통어를 영어로 바꿨다고 한다. 대한항공은 99년 화물기 추락을 마지막으로 추락사고는 없다.

 장유유서 전통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완곡어법은 언론자유가 부족한 조직내 의사소통에서 일상화돼 있다. 그 자체가 나쁜 문화는 아니지만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데는 비효율적이라는 데는 공감한다.


특히 지금처럼 위기극복에 골몰해야 하는 때는 더 그렇다. 좀 버릇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래로부터 문제제기가 직설적으로 전달되고 채택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대통령ㆍ장관ㆍCEO 등 권위를 보이려 하지 말고 자세를 낮춰주면 의사소통도 빨라지고 그만큼 구조조정이나 경제살리기도 좀더 빨리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소통에서 권위를 의식하는 패턴은 사회적 지평으로 넘어가면 말 못하는 상황이 말이 너무 많은 상황으로 변질된다. 먹고 사는 조직에서 누리기 힘든 권력에 대한 항거의 자유, 언론자유가 있는 탓일 게다. '이명박***' 등 시위현장에서 보이듯 표현도 직설적이고 험악하다.

민주냐, 독재냐는 가치규정에서 보듯 말 내용보다 상대방에 대한 정서나 이념적 동질성 여부가 앞선다. 그것이 같은 권위는 숭상해야 할 대상이고 다른 권위는 타도해야 할 적이 됐다.

 말이 많아야 할 곳은 아끼고, 말을 아껴야 할 곳은 거칠게 소모된다. 그것이 한국 소통의 비극이다. 매듭을 푸는 단서는 이 사회 리더의 자세낮춤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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