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

머니투데이 박종면 편집인겸 더벨 대표이사 부사장 2009.05.25 12:52
글자크기
남들과는 다른 극도의 예민함과 감성을 갖고 산다는 것이 현실에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오죽했으면 베토벤을 너무 좋아했던 레닌은 혁명적 열정이 약해질까 음악을 멀리하기까지 했을까요.

유태계 지휘자 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도 그랬습니다. 말러는 14명의 형제 중 8명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살아남은 자로서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평생 죽음의 트라우마에 갇혀 삽니다.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나 '탄식의 노래' 등은 모두 그의 이런 의식세계를 반영한 것입니다.



☞ 구스타프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듣기


5월의 주말 아침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음을 듣습니다. 지역주의와 기성의 권위에 맞서는 그에게 한때 희망을 걸었지만 파격적 언행에 실망했고 그의 정서불안까지 의심했습니다. 드러나는 가족과 친인척 비리를 보면서는 한 가닥 남아있던 연민마저 거둬들인 지 오래입니다만, 그의 부음 앞에서 마음 한구석의 짠함까지 감출 순 없습니다.



63년간 그의 일생은 도전과 풍운의 삶이었습니다. 대통령 당선 이전은 물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늘 그랬습니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조차 노무현식으로, '노무현스럽게' 마감하는군요.

이런 맥락에서 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고향마을의 바위절벽 위에서 몸을 던짐으로써 정적들은 물론 그동안 그를 힘들게 한 권력들을 한꺼번에 잠재우고 말았습니다.
 
죽으면서까지 승부사적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지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탄핵에 따른 제2의 역풍, 제2의 촛불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경계와 불안감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잔인한 해석이고 기우입니다. 아무리 독하고 모진 사람이라 해도 죽음으로 정치적 승부를 걸진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승리는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지나친 결벽증과 원칙 중시, 정치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감성과 예민함 등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된 것으로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검찰 수사에 대한 압박감으로 죽음을 택했다는 해석은 오히려 편협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맞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조금은 미안해 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과 측근들이 돈 받은 문제로 그가 괴로워했을 때, 나와 함께 수렁에 빠지지 말고, 이젠 나를 버리라고 했을 때, 이것을 정치적 꼼수나 노림수로만 해석하지 말고 조금은 그의 진정성에 귀를 기울였어야 하자 않았나 하는 그런 아쉬움입니다.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화해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과 죽음조차 하나인데 정파간 지역간 계층간 갈등은 얼마나 작고 하찮은 것입니까. 살아있는 현재 권력과 죽은 권력간 갈등은 또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산 권력도 몇 년 뒤면 바로 죽은 권력이 되고 마는데 말입니다. 지금 죽은 자의 모습이 바로 몇 년 뒤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논리는 노 전대통령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지지자들이나 야당에도 적용됩니다. 혹시라도 제2의 촛불을 꿈꾸진 마십시오. 그렇다면 그것은 노 전대통령을 한번 더 죽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복수는 접고 화해하십시오.
 
시인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짧은 시가 있지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한 번이라도 누구에게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고.


삼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