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원수", 잊고 싶은 폭탄주의 추억

머니투데이 김희정 기자 2009.01.1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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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생존백서] ⑦술자리에서 필요한 센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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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임종철 기자 shinnara@moneytoday.co.kr
ⓒ삽화=임종철 기자 [email protected]


술은 입사 초기 모든 해프닝의 원흉이다.

주민등록증 받아 쥔 후 꾸준히 벗해온 술일지라도 윗사람 모시고 마시는 건 또 다른 얘기.

윗사람과 술을 마시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자리다. 회사에서의 술자리는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매너를 지키지 못하면 마시지 않는 것만 못하다.



선배들은 '증언'한다. 신입사원에겐 술자리에서의 주도(酒道) 역시 됨됨이를 평가하는 잣대로 작용한다고. 좋지 못한 주사(酒邪)가 있다면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정신 줄을 놓지 말지어다.

# Y씨의 주사는 술이 들어갔을 때 유난히 입바른 소리를 잘 한다는 것이다.



적당한 '충언'에서 그친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술이 들어간 Y의 입이 쏟아내는 말들은 '핵폭탄'급이었다. 윗사람, 아랫사람을 막론하고 일단 존대하는 말투가 시니컬해지기 시작한다면 올 것이 온 셈이다.

Y씨는 입사면접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채용을 기념한 술자리를 가졌다. 임원과 팀장, 같은 부 동료들까지 총출동해 "잘 해보자"며 Y씨의 등을 두드려주는 정겨운 분위기였다.

기분 좋아 마신 술이 열 잔을 넘어가면서 Y씨 특유의 시비 거는 말투가 어김없이 되살아났다. 하필 옆자리엔 앉은 사람이 직속 임원. 시니컬한 말투는 급기야 임원에게로 향하고…. 어느덧 Y씨는 50대 임원을 말 그대로 껌 씹듯 씹으며, 맞장 뜨고 있었다.


"꽈배기를 먹었나.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어?"
"제가 좀 꼬였습니다. 그래서요? 뭐 까짓 거 안 다니고 말죠. 흐흐흐…"

팀장이 제어하고 주변 동료들이 말려도 주워 담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떻게 귀가했는지도 모르게 아침이 찾아왔다. 매 타작 당한 듯 전신이 아픈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무지 깜깜.



'첫날부터 지각하면 안 되지' 싶어 일단 부랴부랴 사무실로 들어선 Y씨. 사무실의 체감온도는 영하 10도로 떨어졌다. 살갑게 인사해도 받아주는 이 없는 침묵의 카르텔.

사무실 동료가 어제 상황을 나직이 일러줬다. '이놈의 주사, 또 발동 걸렸구나.' 그 후로 꼬박 3개월간 Y는 죽은 듯 일만 했다. 술을 자제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 외국계 은행 딜러로 입사한 C씨는 임원과 함께 거래처를 접대하는 자리에 함께 했다.



맥주에 양주가 역하게 섞인 폭탄주가 이어졌다. 폭탄주란 서로 다른 주종을 섞어 마신다는 점에서는 칵테일과 흡사하나, 마시는 분위기나 환경은 배 다른 자식처럼 다르지 않던가.

폭탄주를 즐겨 마시지 않던 C는 임원이 '제조상궁'이 됐을 때 습관처럼, "조금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임원에게서는 곧바로 "신입이 내 술잔을 꺾느냐"는 핀잔이 날아왔다.

'술 권하는 대한민국'의 서글픈 현실이지만 상사의 호의를 대놓고 거절하는 것도 미풍양속은 아니다. 더구나 거래처를 앞에 두고 직속 임원의 위상을 세워주는 것은 기본.



술자리에서는 일단 호의를 보이되,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센스도 필요하다.

# P모양은 지금도 입사 초기 회식자리에서 처음 맛 본 화주(火酒)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부서장들이 하루하루 돌아가며 수습사원들과 저녁 회식을 하던 참이었다. 매일 이어지는 술자리에 속은 너덜너덜해지고 초췌한 몰골에 내가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이 나를 먹는 건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상황.



하지만 조직 분위기 상 여자라고 못 마신다 할 처지는 아니었다. '오늘도 중간에 화장실 가서 게워내고, 아침엔 북어로 해장해야겠구나.'

문제는 이번엔 그저 그런 술이 아니었다. 소주, 맥주, 양주, 폭탄주, 수류탄주 다 먹어 봤으나 '화주'(火酒)는 처음. 40도가 넘는 독한 술에 불을 붙여 단숨에 마시는 악명 높은 술이다.

이건 악취미 중 악취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술잔이 넘어온 이상, 차례를 거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죽기야 하겠어.'



두려움 때문에 한 숨에 들이켜지 못하고 중간에 숨을 쉰 게 화근이었다. 숨 때문에 코에 불이 닿아 화상을 입은 것이다. 화주 파도는 거기서 끊겼다.

P양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동기들은 모두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하지만 정작 P는 코에 붕대를 감은 채 한동안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당시는 사스(SARS, 급성 호흡기증후군)에 대한 우려가 높았던 때였다. 5호선 여의도역에서 통근하던 P양은 '여의도 사스녀'로 불렸다. "못 마시겠다고 하고, 장기자랑으로 분위기나 띄울 걸…"



# 입사 하자마자 남자친구와 이별한 S. 신입사원 환영회다 뭐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쓰라린 마음은 달랠 길이 없었다.

그녀의 쓰린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술잔은 집요하게 S에게로 향했고 안 그래도 울적한 기분이 쓰디 쓴 술 때문에 더 씁쓸해졌다.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중간 중간 헤어진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돌아온 S, 급기야 회식자리에서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흑, 흑흑흐윽…"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갑작스런 S의 8옥타브 대성통곡에 동기, 선배들 모두 대략 난감.

그 오빠가 이 오빠가 아니건만 일단 "미안하다", "남자들이 원래 그렇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 등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회식은 더 이상 회식이 아니라 그녀의 한(恨)을 풀어주는 장이 됐다.



한 번으로 그쳤더라면 좋았으련만. 실연의 상처가 아물기까지 회식 때마다 S의 눈물은 주사처럼 반복됐고, 그녀의 실연스토리는 공중파 TV 프로그램처럼 사내에 중계됐다.

술은 입 조심, 몸 조심해야 할 신입사원을 너무 솔직하게 만든다. 하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분위기를 다운시키거나, 복잡한 개인사를 구구 절절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회식도 업무의 연속이고, 술자리엔 주도(酒道)가 필요한 법이다.

아모레퍼시픽 인사총무 부문 관계자는 "신입사원의 주사는 애교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회사 생활내내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며 "기본적인 주도를 지키고, 주사가 있다면 조기에 고쳐야 더 큰 실수를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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