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따뜻한 새해 되시길

머니투데이 이기형 기자 2008.12.3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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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차가운 사람들과 일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참 따뜻한 분들을 만났다. 적어도 그 당시에, 내게는 그랬다. 여기저기 모자라고 허점투성이지만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그분들 덕분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갑자기 이같은 생각이 든 것은 한권의 책 때문이다.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 '차가운 벽'을 휴일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적한 퇴근길에 읽었다. 오랫만에 든 소설책이어서 그런지, 지하철에서 읽어서인지 두번을 읽고서야 감이 잡혔다.



내용은 이렇다. 파티를 연 여주인공은 밤이 늦어지자 파티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차마 손님들은 내몰 수는 없었다. 마침 그때 친구를 따라 해군 몇명이 집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불청객이었다. 그중 잘 생기고 순진한 한명이 그녀의 덫에 걸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추행하려 했다는 이유를 들어 파티를 끝내버렸다.

그녀가 순진한 해군을 유혹했던 방은, 그러니까 그녀의 덫이 쳐있던 방은 심녹색의 '차가운 벽'을 가진 공간이었다. 그녀는 의도한 대로 파티를 끝내자마자 연한 장밋빛의 '따뜻한 방'에 내려가 잠을 청한다.



이 단편을 읽은지 스무시간쯤 지난 다음날 오후에 문득 내 머리속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따뜻했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행복한 일이다.

정확하게 이 소설의 의미를 찾아낼 재주는 애시당초 내겐 없다. 나는 하드커버의 소설책을 좋아하고, 사는 즉시 포장지 같은 느낌을 주는 책표지를 벗겨버린다. 그렇게 닿는 딱딱한 하드커버의 감촉이 좋다. 그러니까 여기서 화려한 책표지는 차가움, 하드커버는 따뜻함이다.

의도가 있는, 가식이 섞인 관계는 차갑다. 차갑게 만난 사람은 차갑게 헤어지게 마련이다. 따뜻한 사람은 헤어져서도 따뜻함이 남는다.


따뜻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꼬인다. 아이들이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기가막히게 알아차리는 것처럼 따뜻한 사람을 금방 따르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서로 벽을 만들기에 좀 둔감해지는 것는 사실이지만 따뜻함을 찾는 감각은 살아있다.

자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존경스럽다. 그 분들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한다. 폼을 잡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의도된 의도가 없다. 그렇게 따라하고 싶지만 나에겐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난 아직도 폼을 잡고 있고, 잘 보이려고 애 쓴다. 고수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기업도, 나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는 괜찮은데 외국투자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빌려주겠다는 외화를 거절하고 여기저기 외화를 구하러 다니고, 돈이 필요한데도 이상하게 바라볼까봐 대주단에 가입하지 않고, 은행들은 튼튼한데 정부가 지원한다고 하면 밖에서 심각하다고 볼까봐 지원도 못하는 누를 더이상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이 어떻게 보든 우리 스스로 실속을 차리는 것이 '펀더멘털'이 아닐까. 더이상 폼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차가운 겨울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모두가 따뜻한 새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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