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Too Bad To Forget"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8.12.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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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뉴욕리포트]

"서(Sir), 워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어느쪽이죠?"

뉴욕 맨해튼 거리를 걷다보면 길가에 차를 갖다 붙이면서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말쑥한 신사를 만날지 모른다. 길을 가르쳐주면, 출발하려다 말고 생각난듯 말을 잇는다. "이탈리아에서 전시회때문에 왔는데, 샘플로 가져온 아르마니 양복들이 차에 몇벌 있다. 다시 이탈리아로 가져가기도 곤란하니, 100달러만 달라..."
이미 짝퉁시계, 오동나무 바둑판, 부산에서 막 올라온 횟감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기 잡상인들을 다 듣고 겪어본 코리안으로서는 피식 웃음이 나올수 밖에.

그런가 하면 어리바리하게 고개 쳐들고 고층빌딩들 구경하고 다니는 관광객들은 뭔가가 '툭'하고 옆구리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오 마이 갓"이라는 고함을 듣는 경우도 있다. 바닥에 떨어진 '명품' 안경테나 시계를 부여잡고 울부짖듯 인상을 쓰는 기세에 얼떨결에 100달러 짜리 하나를 건네곤 "싸게 막았다"고 생각 할 것이다.



"아니 원, 세계 경제의 중심지, 첨단 금융기법의 본산 월가(Wall Street) 옆에 아직도 이런 원시적 사기꾼들이 활개를 치다니" 2008년 이전이라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올법했다.

하지만 올해, 세상사람들은 가려있던 담장(Wall) 안쪽에서도 길거리의 '생계형' 사기꾼들이나 별 차이없는 원시적 행각들이 벌어져 왔다는걸 알게 됐다.
위험을 최소화하고 투자수익을 극대화하는 천재들이 모여 있다고 알려졌던 월가의 속살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세상 사람들은 '마술'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신용보강(Credit enhancement)'이라는게 결국은 부실자산을 우량자사에 마구 섞어 물타기 한뒤 '보증'을 세워 화장하는 것이었다. 물타기 흔적을 가리기 위해서는 운용자산의 덩치가 크고 회사 이름이 그럴싸 할수록 유리했다. '레버리지(Leverage)'기법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질 수 밖에 없는 위태로운 빚더미였다.
아무리 '첨단'으로 포장해도 '걸레는 빨아도 걸레'이니 원본 자산이 부실하면 금융상품도 부실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큰 보증기관도 부실자산 보증이 쌓이다간 결국은 이름이 아닌 돈으로 떼워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 엄청난 부실더미를 헤치고도 살아남은 금융회사들의 비법은 단순했다.
'TBTF(Too Big To Fail:너무 커서 망할수 없다),'쉽게 말해 갈데까지 가면 살아남는다는 '무대뽀'가 월가의 첨단 생존기법이었다.
TBTF로도 부족해서 숱한 '파생 기법'들도 등장했다.
'TCTF(Too Connected To Fail: 너무 얽혀 있어서 망할수 없다)',
'TITF(Too Important To Fail:너무 중요해서 문닫게 할수 없다',
'TBTS(Too Big To Sell:너무 커서 팔지도 못한다)'...

이런 '무대뽀'의 왕중왕은 단연 버나드 메이도프였다.
'월가 최고 수익률'에 눈이 멀어 꼼꼼하기로 유명한 유대인 부자들과 전통의 유럽 명가들, 세계 최고 금융기관들까지 돈을 갖다 바쳤다.
따지고 보면 실체 없는 실적을 내세워 끊임없이 돈을 끌어들이고, 그 돈이 바닥날때까지 흥청망청 부를 누린 점에서는 월가의 금융위기나 메이도프 사기나 다를바는 하나도 없다. .
자신을 취재하는 사진기자를 거세게 밀어붙이는 메이도프나, 회사가 사실상 망했는데도 보너스와 배당은 받아야겠다던 월가의 경영진·뱅커들이나 당당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월가의 사기극만큼이나 사상 유례없는 금융위기의 해로 기록될 2008년이 가르쳐준 교훈도 단순하다.
가치를 창출해내는 원천이 없이, 뒷사람이 내는 돈으로만 값이 오르는 시장은 그 자체가 폰지사기이다.
이 간단한 교훈이라도 잊지 말아야 그나마 올해가 덜 허망할 것 같다.

"Too Bad To Forget"
잊어버리기엔 너무 끔찍했던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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