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대형화가 부른 禍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2009.01.06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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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청계광장

지난 15년간 우리 정부와 은행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상과제가 있다. 금융 세계화를 선언한 후 양쪽 모두 줄기차게 추진해 온 전략이다. 바로 은행 대형화 전략이다. 우리 은행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길은 덩치를 키우는 길밖에는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부는 줄곧 은행 인수·합병(M&A)을 추진해왔다. 외환위기 직후 금융 구조조정의 방편이 그랬다.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형화를 외쳤다.

은행 역시 독자적으로 M&A를 추진했다. 이 전략이 잘 통하지 않자 혼자 영업규모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 우리 은행의 외형 지상주의 역시 덩치 키우기의 일환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일단 몸집부터 부풀려야 했다.



처음에는 그럴 만도 했다. 몸집이 작아서는 세계시장에서 명함을 내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대형화는 수단이 아니라 목표로 바뀌고 말았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다이어트가 목표가 되고 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외환위기의 공동 정범 가운데 하나가 덩치를 키우다 실속을 놓친 은행들이었다. 그리고 꼭 10년 만에 또 위기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

이번 위기는 대형화를 위해 달려온 은행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자신들의 롤 모델인 세계적인 대형 은행들이 한결같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당장 미국을 대표하는 씨티은행이 흔들리고 있다. 1990년대 남미 국가에 대한 대출로 어려움을 겪었던 이 은행은 중동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보험사인 트래블러스그룹과의 합병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다. 그 후 파생상품에 적극 투자하며 몸집을 불려왔다. 그러다 이번 위기를 맞았다.



세계적인 규모의 은행들 대부분이 이번 금융 위기에서 비슷한 위기에 처했다.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인 월가의 투자은행에 비하면 상업은행의 처지가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업은행들 역시 방만한 경영과 위험관리 부재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이렇게 은행 업무의 본령을 벗어나 위험을 자초한 것 역시 대형화의 유혹이 부른 화(禍)다.

가장 극적인 예는 일본 대형 은행들일 것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치솟던 엔화를 배경으로 세계 금융계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이들의 이름은 세계 은행 상위 랭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 내 자산 거품이 꺼지면서 은행들의 부실이 급진전됐기 때문이다. 대형화를 부르짖던 우리 은행의 롤 모델이 바로 일본 은행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정작 일본 은행들이야말로 실패한 모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지난 15년간 국제 금융시장 흥망사를 살펴보면 생존 전략은 우리 정부와 은행이 소리 높여 외쳤던 대형화가 아니다. 크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고객으로부터 돈을 맡아서 제대로 빌려주는 본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파생상품을 비롯한 각종 자산에 투자하는 것은 부차적인 임무일 뿐 핵심 역량은 아니다. 또한 금융위기를 비롯한 비상 상황에 제때에 대처하는 위험관리가 경쟁력의 요체다. 이 두가지를 무시하고 몸집만 불리려던 은행들은 갑자기 찾아드는 위기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은행들은 여전히 이런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툭하면 은행 지원책만 내놓는 정부 또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인위적 짝짓기를 통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형화가 부른 참사를 다시 대형화로 풀려는 심산이다. 틀린 신념을 갖고 있는 교사가 문제의 답을 모르는 학생을 다시 오도하는 격이다.

문제는 덩치가 아니라 실속이다. 비록 규모는 작더라도 차별적인 경쟁력 있는 은행이 생겨야 한다. 그래야 정부건 은행이건 대형화의 미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은행은 금융위기가 닥치면 덩치는 크더라도 실속이 없는 은행을 언제든 삼킬 수 있다. 금융 위기가 여전한 가운데 우리가 앞으로 목격하게 될 엄중한 현실 역시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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