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되풀이된 '저주받은 학번'

머니투데이 이학렬 기자 2008.12.0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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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시름하는 세대]-20대의 절망

-일자리 자체가 없어 취직 못해
-대학원 진학·졸업 늦추기도
-입사해도 비정규직 불안한 미래

10년만에 되풀이된 '저주받은 학번'


#02학번으로 서울소재 상위권 대학 졸업반인 김상중씨(25·가명)는 요즘 불면의 연속이다. 취업시즌이 마감되고 있지만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배들 말로는 자신의 스펙(학점·토익점수 등 구직자들의 외적 조건) 정도면 작년만해도 1~2군데는 붙을 수 있다고 했는데, 벌써 7군데나 떨어졌다.

경제가 악화되면서 내년에는 상황이 더 안좋아진다고 해서 지방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불러주는 회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회 새내기가 되는 것이 대학 새내기 되는 것보다 어려운 현실이 실감난다.



#서울 모여대에 다니는 04학번 신지은씨(23·여)는 최근 내키지 않는 대학원 진학 준비를 시작했다. 당초 대학원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가고 싶은 회사가 사람을 뽑지 않아서 방향을 틀었다. 대학원 학비 부담이 만만찮고 취업난으로 대학원을 준비하는 얘들도 많아져 그마저도 쉬울 것 같지 않아 고민이다.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2008년, 대학가는 흉흉하다. 대학 졸업을 앞둔 02~04학번들은 '절망'이란 단어를 실감하면서 공유하고 있다. 능력이 부족해서 못 가는 것이 아니라 갈 곳 자체가 없어서 고민은 더욱 커진다.



취업재수를 한다고 해도 나아질 조짐도 없다. ‘마이너스 성장’, ‘구조조정’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벌써 대학가에는 ‘올해가 마지막 취직 기회’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대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직장으로 꼽히는 공기업은 이미 채용규모를 대폭 줄였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한국전력과 토지공사, 주택공사 등 30개 주요공기업의 올해 신규 채용인원은 946명으로 지난해 2839명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게다가 정부는 내년 공무원 정원을 동결키로 했고 공기업 역시 신규채용을 큰 폭으로 늘리긴 어려울 전망이다. 정부가 공공기관에 요구한 경영효율화는 인건비 축소, 신규채용 축소 등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출과 내수가 동반 하락하면서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민간 기업의 취업사정도 역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상반기에는 그나마 신규채용이 있었지만 하반기 들어 채용규모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취업포탈 인크루트가 상장사 482개사의 4년제 대졸 신입정규직 채용현화을 조사한 결과, 신규채용 규모는 3만925명으로 작년보다 3.8% 줄었다.

모 기업 인사담당자는 "구조조정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채용 인원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며 "신규채용을 해도 구조조정되는 사람들을 채우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벽에 부딪힌 취업준비생들은 정부의 일자리 만들기 비상 대책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고 있지만 '내 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다. 그동안 지식경제부, 국토해양부 등 6개 부처가 두 차례에 걸쳐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보고한 일자리 창출 대책과 앞으로 추진될 대책까지 포함하면 내년 정부발 일자리수는 16만개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에 따른 건설 일용직과 일시적인 사회적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건설 일용직을 하려고 한해 몇 백만원을 내고 대학을 졸업한 것이 아니다", "우리같은 청년들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대책"이라는 부정적인 반응 일색이다.

'조건이 좋은' 일자리 취업 문이 사실상 막히면서 청년 실업자들을 반기는 곳은 비정규직 자리 뿐이다.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를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져 취직하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경우 100만명이 넘는 청년 실업자들의 `퇴로`는 비정규직 밖에 없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의 격랑속에 취업시장이 사라지면서 입사를 포기해야 했던 1990년대 초반 학번을 '저주받은 학번'이라고 불렀다. '밀레니엄 학번'이란 희망을 안고 대학에 들어온 2000년대 초반 학번에게 '저주받은 학번'의 공포는 다시 한 번 엄습하고 있다. 당사자들에게는 끔찍한 역사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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