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위기의 본질과 한국의 ‘위기 증후군 유령’

머니투데이 홍찬선 MTN 부국장대우겸 경제증권부장 2008.09.2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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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칼럼]

미국 위기의 본질과 한국의 ‘위기 증후군 유령’


“작년까지만 해도 CEO들의 이익창출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잘 나가던 회사를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 어처구니없어 말도 안 나옵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매분기마다 수십억 달러를 평가손으로 상각해야 하는 유수한 미국계 투자은행(IB) 한국법인 관계자는 최근의 미국 금융위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 말만하고 손사래를 치며 더 이상 말을 아꼈다.



“최근 5년 동안 연봉보다 많은 금액에 해당하는 주식을 스톡옵션으로 받았습니다. 소득세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주가가 계속 올랐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주식의 평가액이 한 때 20억원은 됐지요. 그런데 그게 1억원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미 낸 세금을 감안하면 휴지조각에 불과합니다…”

다른 관계자의 말은 말로만 전해 듣던 미국발 금융위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가 멀쩡하던 한국까지 ‘위기 증후군’이라는 망령에 시달리게 만들고 있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자가 늘어나며, 주식 부동산 원화 채권 등 자산가격이 떨어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에 두려워하고 있다. 외환보유고가 2400억 달러에 이르고, DTI 규제 등 한발 앞선 선제적 대응으로 금융부실 가능성이 적으며, 실물경제도 상대적으로 나은 등 경제 펀더멘털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한국은 2008년 가을의 위기에 대해 억울하다. 주가가 많이 떨어진 것(작년말 1897.53에서 22일 1460.34)은 외국인이 28조원이나 순매도한 탓이 컸다. 환율이 급등(원화가치 급락, 달러당 작년말 936.1원에서 22일 1140.3원)한 것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외국인이 한국에서 운용하던 달러를 빼내갔기 때문이다. 부동산값이 떨어진 것도 미국에서 시작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 직간접적 원인이 있다.

이번 미국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은 크게 2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전 세계적 과잉유동성과 초저금리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감독시스템이다. 1980년대말 S&L 도산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39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은 미국은 그 이후에도 계속 유동성을 확대해 왔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해 저가 공산품을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은 죽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가가 안정돼 과잉유동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엄청나게 풀린 돈은 주식 부동산 원자재 등으로 흘러들어가 ‘비이성적 흥분(irrational exuberence)'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산가격 버블을 만들어 냈다. 자고 나면 상승하는 자산가격을 붙잡기 위해 개인과 기업들은 빚을 내 레버리지 비율을 높였다. 나보다 멍청한 다른 사람에게 더 비싼 값에 넘길 수 있다는 ‘큰 바보 이론’을 믿어 의심치 않은 결과다.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감독시스템도 문제였다. 규제완화와 정보통신(IT)기술 및 냉전붕괴에 따른 로켓이론의 유입 등이 아우러져 복잡다단한 신금융상품이 선보였지만, 높아가는 리스크를 적정하게 통제할 감독이 이뤄지지 못했다. 리스크를 헤지한다며 CDS CDO 등 이름도 생소하고, 구조도 알기 어려운 상품들이 등장해 오히려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당국은 증가하는 리스크를 애써 외면해 버블을 키웠다.

2000년초의 IT버블 붕괴와 2001년의 엔론을 비롯한 대규모 회계부정사건 및 2007년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불거졌을 때마다 미국 FRB는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위기의 근본을 치유하지 못하고 위기 규모를 키우는 잘못을 저질렀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식 자본주의(American Standard)와 미국의 경제지배(Pax Americana)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경영투명성과 단기실적주의에 바탕을 둔 주주자본주의는 경영자를 재임 시 단기이익극대화와 연봉최대화로 이어지는 심각한 모럴해저드를 초래했다. 이런 모럴 해저드는 1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리먼 브러더스를 파산으로 몰고 갔고, 투자는 본인 책임이라는 원칙마저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70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 돈으로 막아주는 더 큰 모럴 해저드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도 이런 과잉유동성과 뒤떨어진 금융감독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피해보고 있다며 억울해 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위기 증후군’이란 유령에서 벗어나려면 과잉유동성 관리와 감독시스템 선진화로 유령이 현실로 나타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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