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병 회장이 인화와 신용의 기업가 정신으로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 등을 지내며 한국 상공업계의 거목으로 한국의 산업합리화운동을 주도한 20세기의 대표적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재벌가의 안주인답지 않게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명 여사의 조용한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고 두산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1931년 5월 숙명여고를 졸업한 지 두 달 만에 명 씨는 공회당(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당시 경성고상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두병 회장과 결혼했으며, 구습의 예의범절과 신교육이 조화를 이뤄 두산 창업주 박승직 부부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결혼 이듬해인 1932년, 명 씨는 맏아들 용곤을 낳았다.
명 여사는 어릴 적 명절 때 쓰던 달걀 껍데기에 남아있는 흰자위를 모을 정도로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명 여사의 시집생활은 평소 그가 체득한 근검절약과 인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기회가 됐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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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명 여사는 박 회장의 뜻에 따라 운수업의 실무를 맡았다. 초기에 운수업은 가업 수준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정도였으나 이것이 훗날 무역업체 ‘두산상회’ 발족의 토대가 됐고, 6ㆍ25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대규모 운수업인 ‘제3모터풀’을 운영하는 데 좋은 경험적 기반이 되었다.
1920년대 박승직 창립자의 부인 정정숙 여사가 '박가분 제조본포'를 손수 경영하였듯이, 박두병 회장은 그의 부인 명 씨로 하여금 운수업을 직접 운영해 나가도록 한 것인데, 창업 1세 부인 정 씨의 '내조 기업 경영'의 전통이 며느리에게 고스란히 전수된 것이다.
명 여사는 박 회장 못지 않은 절약 습성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고 한다. 취사용 가스가 아깝다고 난로에 연탄불을 피워, 곰국ㆍ보리차 등을 끓이며 노는 불에는 팥을 삶고 맹물이라도 올려 놓았을 정도다.
명 여사는 박두병 회장이 동양맥주를 창립하고 대한상의 회장을 지내는 등 국가경제 발전에 주력하는 동안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내조와 자식교육에 전념해 현모양처의 표본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1973년 박 회장이 타계한 뒤부터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근검과 겸손의 정신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전수해 왔다.
그 동안 명 여사는 매년 1월 자신의 생일에 조촐한 축하연을 갖고 또 수시로 가족모임을 통해 인화의 정신을 몸소 보이는 등 집안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으며, 두산이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창업정신을 지키며 꾸준히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데 뿌리가 되어 왔다는 게 두산측 설명이다.
명 여사의 빈소는 서울대학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19일 오전 8시30분 발인이다. (02)2072-2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