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침침해서 난시가 더 심해질 것 같네요."
정부가 고유가에 대처하기 위해 공공부문의 솔선수범을 강조하고 나섰다. 정부가 제시한 에너지 절약책이 '실효성' 없이 업무 효율성만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공무원 사회에서 일고 있다.
빨리 내려온다고 내려왔지만 계단에도 사람이 많았던 탓에 벌써 시간은 12시 15분. 후들거리는 다리로 약속장소에 갔다. 점심은 1시15분까지 먹을 예정이다. 엘리베이터 기다릴 생각을 하니 차라리 느즈막히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 서기관은 점심식사 후 청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실내 냉방온도를 1도 올린 탓에 직사광선이 바로 비치는 자신의 자리는 오후 2시부터는 숨 쉬기도 힘들 정도로 후덥지근해진다. 선풍기라도 마련하고 싶지만 선풍기의 청사 반입도 금지돼 있다.
행정고시에 붙었을 땐 친구들이 부러워했는데 지금은 쾌적한 환경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민간 친구들이 오히려 더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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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에 근무하는 송모씨는 눈이 침침하다. 고유가 대책으로 사무실의 전구를 아예 빼버렸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하나 갖다 놓자니 스탠드 열로 안 그래도 더워진 사무실에 열기를 더해 눈치만 받을 것 같다.
◇실용정부? 과시정부?=중앙청사에 근무하는 박 서기관은 참여정부 이해찬 국무총리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은 오전 9시가 돼서야 냉방이 가동되지만 그 때는 일을 열심히 하라고 오히려 오전 8시부터 에어컨을 틀어줬다. 무더위에는 일찍 출근해 청사에서 운동하고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 업무효율이 더 높았다.
외근이 잦아 자가용을 자주 이용하는 박 서기관은 홀짝제 눈치 때문에 인근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워뒀다. 10분당 500원을 내야 하는데 돈은 돈대로 들고 날은 더운데 공용주차장까지 가서 차를 빼와야 하기 때문에 짜증이 슬슬 인다.
외교통상부 한 심의관은 며칠전 생각만 하면 등에 식은 땀이 흐른다. 중동에서 귀한 손님이 오셔서 회의실에 모셨는데 에어컨 가동이 아예 안 됐다. 중동에서 오신 이 손님은 손부채를 연신 부치며 "한국이 참 에너지 절약을 많이 하네요"라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너무나 창피한 순간이었다.
1970년에 완공된 세종로 중앙청사 건물은 적정인원이 1000명 이하로 설계됐다. 그러나 현재 7개 부처 5000명이 일하는 중앙청사의 에너지 효율은 그야말로 '꽝'이다. 상대적으로 냉난방 시설이 부족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무턱대고 시행하는 에너지 대비책은 에너지 절약보다 더 큰 것을 잃고 있다. 바로 효율성과 공무원으로서의 자부심이다.
국민소득이 늘어나면 당연히 편한 것을 찾게 되는 것이 인간 심리다. 꽉 막고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어진 자원을 잘 활용하고 효율성을 꾀하는 것이 21세기에 맞는 에너지 절약책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