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이 회장이 휠체어 타지 않은 까닭은

머니투데이 방형국 부국장 겸 전국사회부장 2008.04.0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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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4년 일이다.

외국 낯선 거리에서 현대자동차를 보거나, 'CHOYANG','HANJIN'이라고 쓰인 화물 콘테이너만 봐도 코끝이 찡하던 시절, '국가경쟁력 강화'를 주제로 미국 실리콘밸리를 취재할 때였다.

전자제품 대형 마트를 들렀는데, 소니 파나소닉 산요 등 온통 일본제품들이 전시장 주요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삼성이나 LG가 내놓은 TV 등 가전제품은 진열이 아니라 매장 뒤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방치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중앙역. 한 흑인이 손수레에다 녹음기를 팔고 있었다. 수북히 쌓여있는 일제 녹음기 사이로 삼성제품이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그에게 삼성 녹음기 값을 물었더니, 안판다고 한다. 일제 녹음기 성능을 손님이 비교할 수 있게 삼성 녹음기를 1대 갖다 놓았을 뿐 팔려는 것이 아니란다. '비교상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자는 장사꾼의 마켓팅 전략이 미웠고, 속도 상해 삼성 녹음기 성능이 더 좋다며 굳이 그 녹음기를 사왔다.



2002년 여름.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전자제품 대형 마트. 온통 삼성과 LG가 내놓은 대형 TV와 컴퓨터 에어컨 세탁기 내장고 등이 전시장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산요 등의 전자제품을 뒷전으로 몰아냈다.

독립기념일이나, 부활절, 크리스마스 세일기간에는 'SAMSUNG' 로고가 붙은 전자제품이 동이 날 정도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년이라는 시간에 결코 적지 않은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의 위상이 뒤바뀌었다.

기자가 미국에 취재가기 1년전인 1993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신경영 선언'을 발표했다. 신경영 선언은 시대의 화두가 되어, 사회를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삼성이 10년만에 국제시장에서 소니의 위상을 뒤집은 것은 바로 '신경영'을 근본으로 한 기술개발과 품질개선이 있어 가능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여건은 제법 빠른 속도로 성숙해 지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폐지되면 25개 대기업의 출자가 자유로워 진다. 공장설립과 창업절차가 간소화되고, 법인세율도 점차 낮아진다.



금산분리 규제도 풀어져,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대통령이 기업인의 건의 전화를 때를 가리지 않고 받겠다고 한다. 이런 변화들은 경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2008년 4월4일. 이 회장이 한남동 삼성특검팀에 출두했다. 휠체어를 타지 않았다. 이제까지 검찰에 소환되면 값싼 동정심을 얻으려 휠체어를 타고 애써 초췌한 모습을 해온 여느 총수들과 달랐다.

'당당한 모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여러달 동안 소란을 끼쳐 (국민들께) 대단히 죄송하다'는 의혹들을 특검을 계기로 확실하게 규명하고 매듭짓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마무리에 들어선 특검이 끝나면 삼성은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상과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비교상품'이나 만들던 보잘 것 없는 경쟁력에서 불과 10년 사이에 글로벌 1위 상품들로 세계시장을 석권한 저력을 다시 보여야 한다. 그게 국민에 끼친 '소란'과 '죄송'을 갚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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