땟국 찌든 소녀의 손, 잡아줄 수 있을까

희망대장정팀,정리=이경숙 기자 2007.12.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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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아시아, 빈곤을 넘어]<끝-1>80일간의 아시아 빈곤 여행을 마치며

편집자주 2달러, 우리돈으로 약 1800원. 이 돈으로 아시아 인구 중 9억명이 하루를 삽니다. 21세기 이후 아시아 경제성장률은 연 평균6.3%로 다른 지역의 2배에 가깝습니다. 아시아는 과연 빈곤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아 김이경, 윤여정, 주세운 등 세 젊은이로 구성된 '희망대장정'팀이 지난 9월, 아시아 최빈국의 빈곤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80일 동안 이어질 이들의 희망대장정을 머니투데이가 전해드립니다.

↑인도 둥게스와리 마을의 아이들.↑인도 둥게스와리 마을의 아이들.


지난 10일, 인도 뭄바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80일간의 긴 일정을 마친 후 귀국을 위해 건강검진을 받고 요양을 취하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에서도 최빈곤지역을 돌아다닌 탓에 우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인도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예전에 봄베이라 불렸던 뭄바이는 미국 할리우드영화를 이긴다는 '볼리우드(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 영화의 본거지다.



들뜬 맘으로 택시를 탔다. 우리 차가 교통신호로 멈춰 섰을 때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거지소녀였다. 소녀의 몸과 옷에선 땟국이 줄줄 흘렀다. 소녀의 허리에는 자신처럼 더러운 갓난아기가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소녀와 아기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더러움에 대한 혐오, 혹시 우리 몸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컸다.



우리는 무심결에 소녀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차엔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사랑스러운 아기를 안고 있었다. 우리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저 아기, 너무 귀엽다." "아버지 눈빛 좀 봐. 아기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그 때 거지소녀가 차창을 두드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우리의 눈에 다시 소녀의 애처로운 눈빛이 담겼다. 우리는 거지아기를 업은 소녀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기를 번갈아 쳐다봤다.


가슴 속에서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무엇 때문에 이 두 아이의 삶은 이토록 다른 걸까. 거지 소녀에게는 무슨 업보가 있길래 하루 종일 차들 사이를 전전해야 하는 걸까. 왜 사회는 이런 소녀를 외면하고 있는걸까.

사실 이러한 의문이 우리를 80일 간의 긴 여정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거지소녀를 외면하고 말았다. 자책감이 밀려왔다. 우리 일행이 탄 차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졌다.



우리는 80일 동안 방글라데시에서 네팔, 인도까지 남아시아의 곳곳에서 빈곤과 싸우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난 13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만난 가족과 친구들이 물었다. 여행은 어땠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그럴 때마다 말문이 탁 막혔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내야 할지 막막했다. 마지못해 입을 열어도 헛소리 같은 말만 튀어나왔다.

'관해난수(觀海難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그토록 보길 원했던 빈곤의 현장을 다녀와 보니 차마 빈곤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우리가 봤던 비참한 현실, 무수한 희망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우리가 예전에 품었던 생각들을 헝클어놨다.



우리는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에선 밤을 잊은 일꾼들을 만났다. 네팔에서 만난 열정적인 사회적 기업가들은 우리의 꿈을 자극했다. 인도의 메마른 땅에서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 활동가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인도 아메다바드의 시장상인.↑인도 아메다바드의 시장상인.
하지만 지금도 눈 감으면 떠오른다. 외양간 한켠에서 살아가던 방글라데시의 조비타 할머니, 어두침침한 카펫 공장에서 쓴 웃음을 짓던 네팔의 노동자들, 무거운 짐을 진 채 힘겹게 '나마스테'라고 인사하던 짐꾼들, 인도 보드가야로 가는 열차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사탕이라도 없냐'고 묻던 젊은 여자.

우리는 너무나 거대한 빈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중엔 무감각해졌다. '1달러 미만'의 돈으로 하루를 사는 가난한 삶을 80여일 동안 보면서 점차 우리 마음 속 안타까움과 불편함은 사라져갔다. 여행 말미엔 '좋은 음식 한끼' 찾아 먹는 데 몰두하기조차 했다.

무엇이 빈곤일까. 우리가 인도에서 방문했던 맨발대학의 빈민 학생들 중엔 평생 학교를 다녀보지 못한 문맹이 많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집도 짓고 태양열 조리기구와 전등도 만들 줄 안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의 20년을 교육 받은 소위 '엘리트'인 우리는 고장난 손전등 하나 고칠 줄 모른다. 우리는 아직 우리 삶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과연 누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 걸까.

우리가 만약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다면 맨발대학에서 만난 람니와스, 노르티 데비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편견을 깨고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까.

솔직히 우리는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 치열한 경쟁사회가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천민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꿈'이라는 단어조차 모르고 살았던 람니와스, 노르티 데비를 떠올리면 우리의 두려움은 부끄러워진다.



"빈곤 속 희망을 찾아 오겠다"고 큰 소리 치며 길 떠나던 3개월 전의 '김이경', '윤여정', '주세운'은 이제 없다. 80일간의 여행 후, 우리는 모두 달라졌다. 아직은 우리의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머리 속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여행 전의 혈기도 많이 줄어들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다. 예전에 우리는 '지구촌 빈곤'이라는 말을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며 사람들이 지금 당장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다.

여행 후, 빈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우리는 말이 적어졌다. '우리 사회'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게 된 탓이다.



그래도 우리 모두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진보'에는 기나긴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라민 덕분에 방글라데시 여자들은 결혼할 때 지참금을 주어야 하는 악습에서 해방됐다. 이건 30여년이 걸렸다.

수 천년간 배우지 못했던 인도 둥게스와리의 불가촉천민들은 한국의 국제구호기구 'JTS'를 통해 문자를 깨우쳤다. 그 기반을 만드는 데에 13여년이 걸렸다.



인도 아메다바드의 노점 여성들은 자영업여성연합 즉 'SEWA'를 만들어 경찰의 횡포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됐다. 여기까지는 한 세대를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가 보기엔 참으로 불만족스러웠던 네팔의 공정무역의 현장 역시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또, 그로 인해 다음 세대의 삶은 분명 나아질 것이다. 10여년 혹은 한 세대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국엔 진보할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행 동안 부족한 우리들을 도와준 손길과 온정이 과분할 정도로 많았다. ‘여행은 관계’라던 평화여행가 임영신씨의 말처럼, 우리 여행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어졌다.



굿네이버스 방글라데시의 이경엽 지부장은 한국어에 미숙한 통역자를 대신해 숙소와 방글라데시에서 주의점을 알려줬다. 굿네이버스 네팔의 정도용 지부장은 우리 일행 중 한명이 아프다는 전화에 휴일인데도 바로 달려와주셨다.

인도JTS의 한국인 자원봉사자들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썼다. LG전자 인도 푸네 생산공장의 성준면 부장은 우리가 아메다바드에서 영어에 미숙한 인도 의사를 만나 고생하고 있을 때 전화 통화로 지원해줬다.

인도 맨발대학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고생하고 있었을 땐 야스민 고팔 토론토대학 교수는 홀연히 나타나 우리를 취재실패의 위기에서 '구원'해줬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해준 머니투데이, 독자 여러분께 감사한다.
↑10월 9일 네팔 카투만두에서 사회적 무역회사 '리투얼 운송'을 취재한 후, 이 회사의 딜리 투라드하르 대표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희망대장정팀의 김이경, 투라드하르, 윤여정, 주세운.↑10월 9일 네팔 카투만두에서 사회적 무역회사 '리투얼 운송'을 취재한 후, 이 회사의 딜리 투라드하르 대표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희망대장정팀의 김이경, 투라드하르, 윤여정, 주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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