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경영]중년남성 사랑하기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2004.09.01 12:14
글자크기
 한국 중년 남자들의 심리는 나의 관심사 중 하나이다. 내 자신이 중년 남성이고, 여러 기업을 다니며 가장 많이 만나는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무기력하고, 삶에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려 하지 않는다. 고뇌,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런 중년 남성을 볼 때 마다 과연 저들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지 알고 싶고 그들의 문제해결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발견한 책 중의 하나가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의 '남자 대 남자', '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이다. 이와 비슷한 책으로서는 전인권 성공회대 교수가 쓴 '남자의 탄생'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도 비슷한 유형의 책이다.



 "김우중 회장은 일 중독자이다. 일 중독자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일 중독증을 탓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정 한다. 그래서 일 중독증의 치유가 어렵다. 일 중독증은 알코올 중독처럼 사람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무서운 병이다. 일 중독자는 일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한다. 일이 떨어져서 생기는 금단 현상인 것이다. 일 중독의 메커니즘은 알코올 중독과 동일하다. 뭔가 무의식적인 불안 상태를 잊기 위한 방편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김 회장을 움직이는 원초적 본능은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잊기 위한 것이었다. 김 회장이 아들을 잃었을 때가 그의 인생을 뒤돌아 봐야 하는 절호의 챈스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과 마주하길 피했고 그 결과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처음 이 책을 보면서 젊은 여자가 남성의 심리를 알면 얼마나 알까 하는 선입관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같은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보는 방법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현상을 심리학적 시각으로 보는데 대해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구조조정을 하는 회사가 많다.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한 회사 사람들을 만나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이 누렇게 떠 있고, 피곤과 무기력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눈빛이 불안하고 늘 시선이 밖을 향하고 있는데 끊임없이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단체로 무슨 질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에 소개된 ADD증후군 얘길 듣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ADD증후군은 after downsizing desertification 의 줄임말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은 후 기업 내 남은 구성원들이 앓는 정신적 황무지 현상을 뜻한다. '희망도 정서도 에너지도 신뢰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정신적 무감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위협적인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때 나타나는 심각한 정신 병리 현상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거친 사람들이 겪은 질병과 비슷하다고 한다. 구조 조정을 겪은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기업에서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한 중년 남성들 중에도 이런 탈진현상(burnout)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의욕도 에너지도 없고, 삶에 지쳐 힘겹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화를 낸다. 이렇게 힘든 삶에서 행복은 웬놈의 행복이냐는 것이다. 과도한 사회적 책임과 부담, 남자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 가장으로서의 의무...

 휴테크 성공학으로 유명한 김정운 교수는 한국 중년 남성들은 단체로 자폐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자폐증이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남들과 커뮤니케이션을 못하는 병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탄주를 마시고, 술이 취해야 비로소 마음 문도 열고, 다른 사람과 얘기도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중년 남성 문제는 더 이상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위에 소개한 책은 이런 중년 남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남자의 탄생 같은 책은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 남성들이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책을 읽어보면 중년 남성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중년 남성은 너무 힘들다. 과도한 책임감, 가정에서의 소외, 자식과의 마찰, 동료들의 퇴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은퇴 후의 생활 대책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 탈진해 있다. 맛이 가고 있는 중년 남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이다. 그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는 마치 뜻하지 않는 교통 사고로 아내를 잃은 사람에게 "지금이야말로 더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무책임하게 얘기하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외로움에 공감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래야 정신적 황무지가 비옥한 토양으로 바뀔 수 있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