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승강장 몇 번으로 타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어느 방향으로 몇 미터를 가고, 어디로 가서 환승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지도'. 대중교통을 타는 게 두려운,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들에겐 더없이 필요한 정보. 미리 살펴보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7년 동안 직접 지하철역을 다니며 지도를 만든 이들이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엄마, 2호선 강남역에서 신분당선 신논현역으로 갈아타고 싶어. 어떻게 가야 해?"
딸은 서울 지하철을 갈아탈 때마다 걱정이 많다. 여기인가, 저쪽인가. 엘리베이터를 찾아야 하는데, 어딨는지 계속 두리번두리번. 리프트가 있는지 찾느라 계단마다 헤매고. 힘들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휠체어를 타고 강남역에서 신분당선 신논현역으로 환승하기 위해, 몇 번으로 타서 어떻게 가야하는지 이리 상세히 적어두었다. 이른바 서울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 협동조합 무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진=협동조합 무의 홈페이지 내 지도 화면
"지하철 승강장 7-1에서 타서 내려야 해. 6미터만 가면 왼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타고. 내린 다음에 왼쪽 환승통로를 따라 115미터를 더 가야 해. 환승게이트를 통과해서 오후 1시 방향으로 26미터를 더 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신분당선 승강장이 나오면 2-1에서 다시 타고."
지난해 카카오의 '모두가 이동할 지도' 캠페인에서 딸 지민양과 함께 사진 찍은 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그가 딸을 위해, 딸과 같은 교통약자들을 위해 직접 지도를 만든 사람이다./사진=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정확하게는 딸과 같은 장애인들을 위해, 헤매기 쉬운 교통 약자들을 위하여.
태어났을 때부터 하반신 마비…대중교통 좋아하던 지민이
파리에 여행 갔을 때, 윤희씨와 지민양이 함께 찍은 사진. 바라는 건 애쓰지 않고도 수월히 이동할 수 있는 평범한 환경이다. 그게 너무 어렵고 변화가 더디다./사진=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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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치료로 인해 후유증이 남았다. 하반신이 마비돼 지체장애인이 됐다.
휠체어로 쌩쌩 달리는 걸 좋아하던 아이. 지민양은 자동차보단 지하철과 버스 같은 대중교통 타는 걸 좋아했다. 역 이름을 중얼거리며 한글을 배웠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 홍윤희씨(51)는 세상이 다르단 걸 깨닫기 시작했다. 지민이가 휠체어를 타면서부터. 지하철 환승처럼 평범하던 일이, 지민양에겐 너무 힘들다는 것.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탑승해 이동 중인 지민양./사진=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언제 고쳐지냐고 전화했었어요. 어느쪽에 있으시냐 묻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위쪽과 아래쪽이 지하철 관리하는 업체가 다르단 거예요. 환승 구간 안내가 잘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구나 생각했지요."
'지민이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계단조차 못 오르지 않았을까.' 목소릴 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을 탈 때도 지도가 있음 좋을 것 같았다. 그 어디에도 없어서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 유아차를 이용하는 엄마 등을 위한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휠체어를 위한, 서울 지하철 80개역 지도 만들어…지난해 27개역 추가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함께 만든 이들. 2018년 SK그룹 사회공헌 담당자들과 함께. /사진=협동조합 무의 제공
그걸 시작으로 '환승 지도'를 볼 수 있는 서울 지하철역이 80개역으로 늘었다. 지난해엔 티머니복지재단 지원으로 27개역이 새롭게 추가됐다. 올해도 환승 지도를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들에게 지도는 어떤 의미일까. 지도를 만드는데 직접 참여한 임슬기씨. 슬기씨는 뇌병변 장애인으로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그는 이리 대답했다.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함께 만든 한양대학교 학생들./사진=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환승 지도를 쓰는 이들에게 좋은 피드백도 많이 받았다. 윤희씨가 말했다.
"작년에 한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29년 동안 휠체어를 탔어요. 혼자 지하철 타고 출퇴근할 생각을 못했는데, 지도 보며 홀로 출퇴근할 용기가 났다고요. 지하철 지도 만들 때 참여했던 한양대학교 장애 당사자는 또 그랬어요. 지하철을 스물 한 살까지 2~3번 밖에 안 타봤다고요."
지하철 지도의 힘이 단순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단지 현장에서 보고 찾아가는 것 이상이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에겐 헤매고 돌아갈까 두려운 지하철. 타러 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용기를 채울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었다.
언젠가, 이 지도마저 '무의미'해질 수 있도록
파리 몽마르뜨에 함께 여행간 엄마와 딸. /사진=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걱정하지마 엄마, 엄마가 만들어준 지도가 있잖아."
윤희씨는 그 말에 크게 고무되었다고 했다.
지하철 환승 지도뿐 아니라,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교통약자를 위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4대문 안을 휠체어로 소풍다니기, 궁 지도, 대학로 완전 정복(휠체어 접근 가능 식당, 카페, 편의점, 화장실) 등이다.
"제 딸이 사회에 나오기 전에 세상을 좀 바꿨으면 좋겠다 시작했어요. 인식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물리적인 건 바뀐 게 많이 없고 갈 길이 멉니다." 딸에 대한 염려로 오늘도 무언가 바꾸어내기 위해 힘쓰는 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의 말이었다./사진=홍윤희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제공
갈 길이 멀다. 세 가지가 해결돼야 한단다. 첫째는 엘리베이터 설치 등 물리적인 환경 변화. 둘째는 현장에서 수월히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안내. 셋째는 인식. 엘리베이터 하나 타는 데에도, 새치기 등 때문에 수십 분씩 기다리는 것.
이 지도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장애인들이 다니는 환경이 나아지기를./사진=협동조합 무의 홈페이지 '환승 지도' 화면
윤희씨는 역설적이게도 향후 바라는 목표에 대해 이리 대답했다. 자신이 만든 지도마저 필요 없길 바라는, 엄마의 진심.
그때 협동조합 이름이 왜 '무의'인지 알 수 있었다.
서울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엔 80개 역의 정보가 담겼다. 직접 발품을 팔며 만든 것. 협동조합 무의를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와, 메뉴에서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눌러 역명을 검색하면 된다./사진=협동조합 무의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