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15일 경기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조사 중인 미국인 선교사의 모습. 당시 일제는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민간인 20여명을 학살했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시 화성 지역 주민들은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송산면, 장안면, 우정면 등에서 만세 시위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 만세 행군에는 1000명이 넘는 시민이 함께했다. 시위대는 일제 무단 통치의 상징이었던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1919년 4월15일 일본군이 경기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뒤 민가를 불태운 모습. 당시 일제는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민간인 20여명을 학살했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언더우드 일행은 현장에 있던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참상을 확인했다. 이후 영국인 선교사 스코필드(Schofield F. W.)도 현장에 합류했다. 이들은 비극적인 제암리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생존자 증언 등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다.
1919년 4월15일 일본군이 경기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뒤 교회를 불태운 모습. 당시 일제는 3·1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민간인 20여명을 학살했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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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에는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제가 은폐·축소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담긴 일기가 '아사히 신문'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 일기는 사건 당시 일제의 조선군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1861~1922)가 쓴 것이었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우쓰노미야는 1919년 작성한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간단하지만, 학살과 방화를 자인하게 돼 (일본) 제국에 불이익이 올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간부와 협의해 (민간인들이)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과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썼다.
언더우드와 스코필드 등 선교사들의 현장 방문 및 조사, 일제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은 생존자 증언 등이 없었다면 제암리 학살 사건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경기 화성시는 매년 희생자 추모제 등을 개최해 제암리 학살 사건의 아픔을 기리고 있다.
2019년 4월15일 '4·15 100주년 화성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추모제'에서 서철모 당시 화성시장이 발언하는 모습. /2019.04.15.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