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상품개발자는 점쟁이?" 40년 후 내다봐야 하는 보험약관

머니투데이 전혜영 기자 2018.12.07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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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폭탄 고무줄 금융약관]<3>암보험 판매 14년 만에 요양병원 첫 등장, 과거에 없던 리스크에 현재 잣대 적용 리스크 과도

편집자주 자살보험금과 즉시연금 등 금융회사의 약관을 놓고 수천억원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뭐가 문제길래 약관은 금융회사의 덫이 된 걸까. 약관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약관을 둘러싼 분쟁을 해소해 소비자를 보호하고 금융회사도 짐을 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봤다.

[MT리포트]"상품개발자는 점쟁이?" 40년 후 내다봐야 하는 보험약관


암보험금 지급을 둘러싼 소비자와 보험사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 입원일당 지급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올해 국정감사장에서도 도마에 올랐다. 암보험 입원일당 분쟁에는 요양병원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암보험 약관 상 직접치료 목적일 경우 입원일당을 지급하게 돼 있는데 최근 요양병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수술 후 요양목적으로 입원한 후 보험금을 청구하는 가입자도 많아 분쟁이 급증한 것이다.

◇40년 후 내다봐야 하는 보험약관= 국내에서 암보험이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80년 12월이다. 당시 국내에는 요양병원이 없었다. 요양병원은 1994년부터 공식 설립되기 시작해 2008년 690개, 2011년만 해도 988개였다. 이후 빠르게 늘어나면서 2016년 1428개로 5년간 1.45배 증가했다.



암보험 약관을 처음 만들던 당시는 요양병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40년 후에 요양병원 입원일당 보험금 지급을 둘러싸고 지금과 같은 분쟁이 벌어질 거라고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보험은 다른 금융상품과 달리 종신 보장을 포함한 장기 상품이 많다. 보험업계에선 시대 상황은 빠르게 변하는 데 약관은 수 십 년 전 만들 당시가 아니라 현시점에 맞춰 적용하라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1~2년 후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과거에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을 현재 기준을 잣대로 몰랐던 것도 잘못이니 금융회사가 다 책임을 지라고 한다면 미래 예측 리스크가 과도하다"며 "앞으로 보험상품은 점쟁이들이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토로했다.



시대 상황을 반영해 약관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도 금융위원장의 명령에 따라 약관을 바꿀 수 있지만 당국이 직접 나서 해석상 문제가 생길 만한 약관을 사전에 바꾼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백영화 보험연구원 금융법센터 부실장은 "지금은 문제가 된 약관에 대한 개정만 이뤄지기 때문에 새 상품만 적용을 받고 과거 상품은 문제된 약관이 그대로 남아있다"며 "계약내용은 계약할 때 정해지는 거라 임의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제도개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국이 잣대, 합리적 조율할 민간기구 부재= 해외에서는 약관의 해석을 둘러싸고 분쟁이 생겼을 때 민간자율조정 기구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


일본은 보험 관련 민원이 발생할 경우 감독당국인 금융청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보험협회 내 생명보험상담소에 신청한다. 기본적으로 상담소에서 민원을 해결하고 분쟁이 해소되지 않으면 상담소 내 재정심사회가 나서 조율한다.

재정심사회는 생보사와 이해관계가 없는 변호사 등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되며 금융청이 지정한다. 일본에서는 보험분쟁이 소송으로 가기 전에 대부분 재정심사회에서 논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소비자의 수용도도 높다. 실제로 2012년 한 암보험 계약자가 항암제를 맞고 장염에 걸려 25일간 입원했다며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청구한 건에 대해 심사회는 암의 직접 치료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했고 계약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일본에서는 민간자율조정 기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문화가 오랜 기간 자리 잡아 사회적으로 신뢰가 생겼다"며 "계약자가 조정 결과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극소수이기 때문에 보험분쟁 사례도 극히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미국 뉴욕주에서도 소비자 보호조직의 중재가 실패할 경우 주 정부가 인정한 외부 전문중재기관을 활용한다. 건강보험 분쟁은 해당부문 전문의로 구성된 민간 중재기관을 활용하며, 특히 미국중재협회(AAA)는 건강보험 뿐 아니라 손해보험 등 다양한 부분에서 소비자 분쟁을 중재하고 있다.

국내는 금융당국이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를 통해 분쟁을 조정한다. 문제는 분조위는 가급적 소비자에게 유리하게 결정하는 구조다. 즉시연금 사태도 분조위에서 보험금 지급을 결정했지만 보험사가 불복해 소송으로 간 사례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국내에는 일본의 재정심사회 같은 민간기구가 전무하다보니 역할을 기대할 수 없고 금융당국 중심으로 일방적인 결정이 계속돼 갈등이 커지는 양상"이라며 "약관 해석 등을 둘러싼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금융회사와 소비자 모두 신뢰할 수 있는 민간자율조정 기구를 설립해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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