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금주령과 기업규제3법[오동희의 思見]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 2020.10.19 05:32
"법을 제정하는 도리는 반드시 신중히 하여야 하며 법을 시행하는 요점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귀중합니다. (중략) 비록 눈앞에선 효과가 있을 듯하나, 반드시 끝에 가서는 폐단이 쉽게 생길 것입니다. 가령 새로 제정한 것이 옛날의 법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중략) 부득이 처음 시행할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하문하여 의견이 모두 같은 뒤에 시행하소서"

언뜻 보면 요즘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업규제3법(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안과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에 대해 성급하게 개정하지 말고, 기업들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것과 하나 다를 게 없는 목소리다.

7년여 전 정치권을 중심으로 각종 경제민주화법이라면서 규제법안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도 칼럼에 한번 인용했던 문구이지만 그 이후에도 정치권의 행태는 변한 게 하나 없다.

이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인 영조 40년(1764년) 7월 25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금주령과 관련한 세간의 논란을 사간원(조선시대 언론담당 기관) 정언이 올린 간언이다.

정조 때 사헌부 대사헌과 병조·예조·형조 판서 등을 지내게 되는 구상(具庠: 사간원의 정6품 직책인 정언)이 이날 경희궁 연화문에서 진행된 영조의 아침회의(조참)에 나와 한 말이다.

당시 영조의 치세기간이 40년이 될 정도로 오래되다 보니 그에게 바른 말을 하던 인물들이 사라졌던지 영조는 신하들에게 직언을 요구했다.

구상의 발언이 있기 하루 전인 24일 아침회의에서 영조는 "옛날 조참 때는 누구나 진언을 한 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묵묵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다"며 "내일은 직언을 구할 터이니, 말을 해주어 나의 뜻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재촉했던 것이다.

그러자 구상이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금주령'의 폐해를 주제로 간언한 것이다.

구상은 국가적 제례나 집안 행사에서 술을 올리는 것을 금해서는 안된다는 직언과 함께 금주령의 엄격함과 잦은 변경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구상은 과거에도 이런 직언을 했다가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금주 단속 관원들이 가정집을 찾아가 장단지나 소금단지를 못쓰게 만들고, 옷상자나 곡식자루 따위를 모두 훼손하는 것은 물론, 밀은 누룩을 만드는 원료라 하여 먹지 못하게 버리도록 하고, 닭과 돼지는 금주 단속 관원들에게 제공하느라 바닥이 나 종자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백성들의 피해를 설명했다.


또 관원들이 단속을 빌미로 뇌물을 받는 우환이 한두가지가 아닐뿐더러, '술을 마시는 것'과 제례에 '술을 사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니 이를 지나치게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자, 정조도 "그 말이 옳다"고 하면서도 정책은 바꾸지 않았다.

영조는 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그 어느 왕보다 강한 금주령을 시행했고 국가 제례에도 술이 아닌 감주(단술)를 올리도록 하는가 하면, 밀주를 만들면 사형에까지 처하는 엄한 벌을 내렸으나, 밀주가 사라지거나 백성들의 삶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최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산하 공정경제 태스크포스(TF)와 정책간담회에서 "병든 닭 몇마리를 잡자고 투망을 던지냐"고 한 말과 정언 구상의 사형까지 처하는 엄격한 금주령의 폐해에 대한 비판은 많이 닮아 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은 과하다. 법을 만들더라도 과하지 않게 그 폐해를 사려 깊게 고민하고 근본 문제의 해법을 찾자는 게 박 회장과 구상의 닮은 생각이다.

하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간언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니들이 제대로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려 해도 자신의 이념에 갇혀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

자신만이 옳다는 이념에 사로 잡혀서는 결코 백성(시민)을 편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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