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새벽 4시30분, 어스름이 깔린 서울 종로구 낙원동 구석 20평 남짓 가게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70년 된 우거지 해장국 집이다. 펄펄 끓는 수증기를 따라 들어가니 고소하고 얼큰한 냄새가 코 끝에 스쳤다.
아직 손님이 없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이미 손님 세 명이 국밥을 들이키고 있었다.
"해장국 하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뜨끈한 뚝배기에 담긴 우거지얼큰탕(해장국)과 갓 지어진 흰쌀밥, 직접 담근 깍두기 한상이 차려졌다. 단돈 2000원이다.
두어번 깍두기를 더 가져와 먹던 택시기사 이모씨(62)가 십여분 만에 식사를 마쳤다. 그는 도봉구에 위치한 차고지에서 택시를 끌고 곧바로 식당으로 왔다. "일주일에 네 번은 꼭 먹는데, 벌써 20년이 흘렀네. 옛날 생각 나는 맛이야." 아침 식사를 마친 이씨는 기분 좋게 하루 영업길에 올랐다.
밤 영업을 마치고 식사를 포장해가는 이도 있다. 밤새 일한 택시기사 신경묵씨(63)는 2인분을 포장해 은평구 집으로 향했다.
노포(老鋪)는 이렇게 매일 새벽 4시30분 문을 열고 하루를 마감하는 이들과 시작하는 이들을 반기며 종로 한복판서 70년을 버텼다.
그 사이 결혼 직후 시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은 사장 권영희씨(71)도 할머니가 됐다. "벌써 40년이 됐네. 매일 같이 장사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어."
빠르게 흐른 시간과 달리 밥값은 더디게 올랐다. 권씨가 처음 가게를 물려받은 70년대 400원이던 밥값은 이제 2000원이다. 2010년 9월까지 17년간 유지해온 1500원에서 500원을 올렸다.
밖에선 라면도 사먹지 못할 값에 애가 타는 건 손님들이다. 적자가 나 장사를 그만둘까봐 하루에도 너댓명씩 값을 올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권씨의 대답은 한결같다. 가격 인상은 없다는 것. "많이들 물어봐. 또 값을 올릴 때가 된 게 아니냐는 거지. 근데 어떻게 더 올려, 안 올려. 그리고 더 올리기 전에 나도 이제 장사 그만하고 내 인생 살아야지."
스테인레스 통을 갖고와 8인분 포장을 요구한 40대 남성을 가리키며 권씨는 방긋 웃는다. "저 아저씨는 저기 도봉구 창동서 왔어. 트럭 운전하는데 애가 셋이야. 애들이 우리집 우거지국을 좋아해서 자주 포장해가. 오는 사람 다 최소 20년 단골인데 가족 살림살이 모르는 게 이상하지."
새벽에 고단한 이들이 찾는다는 것도 장사를 접을 수 없는 이유다. "일손이 부족하니 손님들이 알아서 더 갖다 먹고 다 먹은 그릇은 설거지통 앞에 갖다가 놓고 그래, 서로 잘 아니까."
값이 싸도 정성으로 준비하는 게 권씨 신념이다. "싼 음식이라 나쁜 재료 쓴다는 말도 있는데, 다 늙어서 무슨 돈 욕심이 있다고. 그러면 이 장사 안했지." 그는 마장동 축산시장에서 사온 소뼈로 육수를 우리고,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서 산 우거지를 가게 창고에 저장해두고 겨울을 난다. 국물에 직접 빻은 고춧가루, 두부, 마늘, 대파 등을 넣고 한소끔 다시 끓여 낸다.
권씨는 웃으며 말했다. "자식 세명 모두 사회서 남부럽지 않은 사람들이 됐어. 내가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장사하며 나름대로 좋은 일 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요."
내일도, 모레도 해장국집은 새벽 4시30분 손님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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