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져 보면 ‘거두는 자’와 ‘내는 자’, ‘내는 자’와 ‘안 내는 자’, ‘낼 수 있는 자’와 ‘낼 수 없는 자’, ‘더 내는 자’와 ‘덜 내는 자’, ‘전가하는 자’와 ‘전가당하는 자’ 등 각각의 이해관계와 심리가 다 다르다. 떡은 남의 것이 커 보여도 세금은 나의 것이 늘 많은 법이다.
모두를 불만족시키기 쉬운 까닭에 세금을 잘못 거두면 정권을 내놓는 경우가 생긴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인두세를 거두려다 저항에 직면해 실권한 일, 일본의 민주당이 소비세를 올렸다가 집권당 지위를 내준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권만 위태롭게 하는 게 아니라 엘리트 관료의 사회적 생명도 끊을 수 있다. 2014년 연말정산 파동 때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뽑겠다”고 했다가 ‘거위들’의 분노를 산 일화가 그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올리는 건 정치적 결단의 영역이다. 당청이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신중한 접근을 무시하고 특정집단과 계층을 대상으로 세금을 더 거두겠다고 나선 건 정치적 운명을 건 승부수다. 당연히 ‘정책’보다 ‘정치’가 우선이다.
물론 시기만 명확하지 않았을 뿐 방향성은 정해져 있었다. 대선공약에 ‘소득세 최고세율 조정’ ‘재원부족시 법인세 최고세율 원상복귀’ 등의 문구가 있었고 국정기획위원회의 100대 국정과제에도 ‘종합적으로 감안’이라는 단서를 달아 한 줄 걸쳐놓았다.
‘복지정책이 곧 경제정책’인 정부로서는 통상적인 세수 증가분 이상으로 돈이 필요하다. 집권 초 기세를 몰아 전광석화처럼 시도하려는 게 새 정부의 스타일이다. 내년까지 기다리다 동력이 떨어지면 숙제를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내는 자’ ‘낼 수 있는 자’ ‘더 내는 자’는 소수인 데다 지지기반도 아니다. ‘전가’라는 파급효과는 당장 눈에 안 보이는, 나중 문제다. 그런데 이렇게 ‘부자 먼저’라는 명분을 쌓으면 다음 단계는 ‘보편적 증세’가 된다. 이미 면세자 축소, 소비세 인상 등 ‘조세정의’와 ‘형평성’을 강조하는 각종 담론은 정부 개입 없이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하려던 전력도 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종합부동산세 대상은 6억원 이상에서 시작했지만 서민주택을 제외하고 순차적으로 중산층을 대상에 포함해 3억원 이상 주택도 과세하려고 했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어느 순간 ‘남의 세금’은 중산층 또는 서민인 ‘나의 세금’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모든 사안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 기준인 정부가 조세부담률을 끌어올리려면 십시일반 더 걷는 방법 말곤 없다.
“증세 없는 복지”란 허구를 셀 수 없이 되뇌었던 전 정권은 명목세율은 그대로 두면서 월급쟁이들의 실효세율을 올리는 방식으로 ‘증세’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들에는 증세가 전혀 없다”고, “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고 했지만 그의 ‘선의’는 ‘조세정의’와 ‘형평성’이란 원칙적 요구를 저버릴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정치’보다 ‘정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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