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러닝화 250켤레값 돌려준 통 큰 사장님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 2013.10.13 15:14

편집자주 | 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몇년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정민호 러너스클럽 사장/페이스 북 캡쳐

지난주, 거금 14만원짜리 최신형 마라톤화를 공짜로 얻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기에서 '땄다'.

한달 전 쯤 회사 앞의 스포츠 용품 전문점 '러너스 클럽'이 한달에 체중을 3kg 빼면 운동화 값을 환불해주는 이벤트를 벌였다.

비슷한 시기에 글로벌 브랜드인 헤드(Head)의 국내 본사가 똑같이 3Kg 감량 이벤트를 했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조그만 전문점에서 이런 이벤트를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매출규모가 큰 헤드의 이벤트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특정 상품의 마케팅과 재고처리라는 효과를 노린 반면, 러너스클럽의 이벤트는 말 그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떤 브랜드건 얼마짜리건 본인이 신발을 고를 수 있는 것이어서 사람들 입맛을 몇배 다시게 만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광고도 하지 않고 보도자료 뿌리지도 않고 순전히 문자나 페이스북같은 '사적인' 경로로 알렸을 뿐인데도 강호의 '공짜 헌터'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나 역시 후배 몇몇까지 부추겨 이벤트에 참여했다. "소소한 목표가 심신의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해 준다"는 명분으로.

350켤레가 넘는 신발이 순식간에 '팔려' 나갔고, 결국 4일만에 판매를 중단해야 했다. 확률이 51%는 돼야 도박을 하는 거고, 그게 아니라도 반반 정도는 돼야 해 볼만한 게임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보기엔 처음부터 주최측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이런 분들 오시면 안되는데..."
정민호(43.사진) 러너스클럽 사장도, 체중100kg에 육박하는 손님들이 신발을 집어 들고 체중계에 오르는 걸 볼때 이미 '패배'를 예감한 듯 했다. 이런 사람들, 몇 끼 굶고 화장실 개운하게 다녀오면 3kg은 하루에도 빠진다.

그로부터 한 달.
지난 1~5일 진행된 '계체량'에서는 일찌감치 3Kg 목표를 초과달성한 '승자'들이 줄을 이었다.

"생각을 잘못했어요 허허.."

마라톤 풀코스 최고기록 2시간 57분42초의 '서브(Sub)-3' 주자이고, 철인3종 경기 산악마라톤을 즐기며 60kg이 채 안되는 몸무게를 유지하는 정사장이 보기엔 3kg 감량이 쉽지 않은 목표로 보였을 터였다.

특히 그의 예상이 빗나갔던 건 이벤트의 참여 고객층.
이 매장의 주된 고객은 건강에 본격적으로 신경을 쓰게 되는 40~50대인데, 이벤트가 시작되자 평소 구경하기 힘든 20~30대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
그는 "12년의 영업기간 중 응대해봤던 20~30대 고객수보다 더 많은 수의 20~30대 고객을 단 4일만에 본 것 같다."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공짜 이벤트'에 목마른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응집력과 정보 공유능력을 과소 평가한 거다.

사흘은 굶은 듯 매장에 거의 기어들어오다시피 해서 체중을 재고는 돈을 돌려받고 나가는 젊은이들을 볼 땐 속도 상했을 법 하다.
"체중감량 이벤트를 운동의 계기로 삼는, 건강하고 상식적인 반응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사행심을 조장한게 아닌가 후회가 들기도 했다"고도 했다.

속으로 뜨끔했다.
말을 안했지만 나도 '비장의 무기'를 썼기 때문이다. 계체 당일 오전에 여의도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 참가신청을 해 둔 것이다.
한달간 식사도 좀 자제하고, 휴일엔 평소보다 많이 달려 2kg정도 줄이긴 했지만 마지막 1kg는 쉽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무기'로 승부를 봤다.

가을답지 않게 섭씨 27도까지 오른 쨍쨍한 날씨 속에 물 마시는 것도 최대한 자제하며 42.195킬로미터 달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 상태 그 대로 매장으로 직행, '-4.4kg'를 찍고 가볍게 환불 받았다. 회사 후배들도 일찌감치 무난히 성공했다.
전체 도전자 가운데 신발 값을 돌려 받은 이는, 약 250명. 참가자의 70%에 달한다.

정사장의 '무모한' 이벤트는 결과적으로 2000만원이 훨씬 넘는 손실로 이어졌다. 점포 규모로 보면 적지 않은 돈이다.
타깃 고객층을 잘못 상정했고, 치밀한 시뮬레이션과 안전장치(1개월 유지조건이라든지, 체중 비율에 따른 목표설정)를 마련하지 못했던 점 등등, 마케팅으로 보면 실패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이 비용과 수익은 아니다.
"신발 값 돌려 받은 사람들이 그 운동화 신고 달리기를 시작하면 정사장의 본래 목적이 달성되는 거고, 그 사람들이 고객이 돼 저절로 매출도 올라갈 거예요"라고 건넨 '위로'의 말은 진심이다. (어제 부 MT에서 상품으로 내 건 러닝화 두 켤레를 사는 것으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었다)

조지 쉬언의 달리기 고전 '달리기와 존재하기' 제목처럼, 그 중에 몇 명이라도 한 켤레의 공짜 신발을 육체(달리기)와 정신(존재)을 이어주는 다리로 쓴다면 이런 '무모한 마케팅'은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철학자가 달린다'의 저자 마크 롤랜즈의 정의에 따르면 '놀이'는 목적성이 배제된, 그 자체에 몰입하는 활동이고, 달리기는 인간의 활동 중 '놀이'의 본질에 가장 근접해 있다.

한 마라토너 사장님이 벌인 통 큰 이벤트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본질적인 '놀이'를 '일'로 연결시킨 사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통 큰 놀이'가 아닐까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든다.

40대가 가기 전에 저런 '놀이'로 사고 한번 쳐야 하는데 말이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나훈아 '김정은 돼지' 발언에 악플 900개…전여옥 "틀린 말 있나요?"
  2. 2 "390만 가구, 평균 109만원 줍니다"…자녀장려금 신청하세요
  3. 3 차 빼달라는 여성 폭행한 보디빌더…탄원서 75장 내며 "한 번만 기회를"
  4. 4 "욕하고 때리고, 다른 여자까지…" 프로야구 선수 폭로글 또 터졌다
  5. 5 동창에 2억 뜯은 20대, 피해자 모친 숨져…"최악" 판사도 질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