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벼룩들을 더 높이 뛰게 하려면

머니투데이 실리콘밸리=유병률 특파원 | 2013.05.13 06:00

[유병률의 체인지더월드] <47>

뉴욕의 창업가들의 위한 코워킹 스페이스 '뉴워크시티(New Work)' 모습. 임대료는 한달 300달러 수준이다. /TNW

중세유럽에서 도제와 장인은 상호 인격적 관계였다. 기술교육과 인성교육이 병행됐고, 견습기간을 마친 도제는 쉽게 장인이 되면서 본인의 작업장을 차릴 수 있었다. 근대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도제제도는 와해되는데, 교육만 담당하는 학교와 고용만 담당하는 기업으로 대체된다. 상호인격적이던 관계는 노동자와 고용주라는 철저히 계약적 관계로 바뀌고, 일하며 배워서 내 사업장을 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젊은 테크놀로지 창업가들에 의해 이런 도제제도가 다시 시도되고 있다. 그것도 세계 비즈니스의 중심인 뉴욕 한복판에서 말이다. 최근 뉴욕타임스와 포브스는 ‘디지털 시대의 도제들(The apprentices of a digital age)’이라는 제목을 붙여, 도제교육을 통해 창업가들을 배출하는 비영리기관 ‘엔스티튜트(Enstitute)’를 잇달아 소개했다.

엔스티튜트는 올해 처음으로 도제프로그램 대상자를 선발했는데, 총 500명이 응시해 11명이 뽑혔다. 이중에는 대학 졸업자도 있지만,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자, 대학 중퇴자이다. 엔스티튜트는 “학교에 관심 없는 사람, 학교가 맞지 않는 사람, 학교에 다닐 여유가 안 되는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도제들에게 일을 시키고 교육을 담당할 장인들은 여러 IT회사들의 베테랑들이다.

이 둘의 관계는 기간도 짧고 잡무 위주의 인턴 제도와는 다르다. 인턴이라면 배우기 힘든 테크놀로지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을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1~2년씩 바로 옆에서 가르치고 배운다. 엔스티튜트의 모토도 ‘일하면서 배우는 것(learning by doing)’이고, 이를 통해 도제들이 자신의 회사를 창업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뉴욕에 사는 19살의 쟈스민 가오는 대학 1학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이 프로그램에 합류했다. “20만 달러(약2억2000만원)씩이나 빚을 져가며 굳이 대학을 다녀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테크놀로지 스타트업(초기벤처)을 창업하는 것. 쟈스민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단축URL 서비스회사인 비틀리의 수석 데이터 사이언디스트 힐러리 메이슨(31)를 소개받은 뒤, 함께 일하며 전문적인 코딩 등의 교육을 받고 있다. 힐러리 입장에서도 아마추어의 신선함을 수혈하고 있는 셈인데, 그는 “쟈스민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19살에 알았더라면, 세상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란 어렵다. 도제교육이 거대대학을 대체하기도 어렵고, 이후 혼자 창업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오래 전 경영학자 찰스 핸디의 예견처럼, 코끼리(거대조직)의 일원인 것이 전부였던 시대가 가고, 능력 있는 벼룩(개인)들의 시대가 오기는 했지만, 벼룩들의 삶은 참으로 험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벼룩들도 진화하고 있다. 혼자 살던 벼룩들이 서로 도울 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와 뉴욕에서는 개인 창업가들에게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 공동사무실)’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 전만해도 벼룩들의 아지트는 어두컴컴한 차고였지만, 지금은 책상 쫙 펼쳐져 있고, 자판기 앞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열린 공간이 이들의 작업실이 되고 있다. 혼자서 일하면서, 동시에 함께 일하는 셈이다.

프리랜서 작가들은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의 공간에서, 테크놀로지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해커 스페이스에 모여 일한다. 이들은 각자의 창업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창업을 도와주고, 그러다 하나로 뭉치기도 한다. 자신들의 장비를 나눠 쓰기도 한다.

실리콘밸리 팔로알토의 한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창업을 준비했던 재미교포 창업가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 생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혁신이 나온다”면서 “코워킹 스페이스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준다”고 말했다.

대학과 기업의 코끼리를 거부하고 뛰쳐나온 수많은 벼룩들은 참담할 때가 많다. 차라리 다시 코끼리에 투항하고 싶을 때도 많다. 특히 벼룩조차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는 한국에서는 말이다. 벼룩들을 위한 더 많은 공동의 공간, 벼룩들을 키워줄 수 있는 더 많은 장인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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