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구 시신 겹겹이 쌓여 공장 천장에…성공한 여사장 실체 '경악'[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이소은 기자 2024.08.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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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당시 사고현장 모습.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당시 사고현장 모습.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북리의 오대양 공예품 공장에서 집단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공장 내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와 가족, 종업원 등 32명이 숨진 채 발견된 것. 이 회사는 사이비 종교에서 운영하던 회사로 사망자 대부분은 해당 종교 추종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왜 집단 자살을 선택했을까.



성공한 여성 사업가 박순자의 실체
당시 사고현장 모습.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당시 사고현장 모습.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사건의 발단은 박순자(당시 48세)가 오대양이라는 사이비 종교와 기업을 만들며 시작됐다. 박순자는 과거 신학교를 다니다가 여호와의 증인에 입교, 다시 기독교복음침례회인 권신찬·유병언의 구원파에 출석했다.

이후 구원파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탈, 1984년 5월 대전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따르는 사이비 종교 겸 회사 오대양을 직접 만들었다.



1984년 민속공예품 제조사 오대양을 만든 후 수입품 판매장을 만들며 사업을 시작했다. 대통령상 수상, 88올림픽 공식 협력 업체 지정에 힘입어 대전, 용인 등의 공장을 사들이며 사업을 확장했다. 이외에도 유치원, 양로원, 보육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대해 사회사업을 하는 등 박순자는 성공한 여성 사업가로 평판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보육원의 원생들은 사실 직원의 자녀였으며 양로원의 노인들도 직원들의 부모였다. 민속 공예품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생산하고 있지 않았으며 자사 생산 제품은 사실 다른 곳에서 사 온 모조품이었다.

사업 실패, 사채 독촉과 집단 변사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그러던 중 1986년 4월 일본의 모 전자 부품 생산업체와 합작, 당시 거액인 7억원을 투자해 전자제품을 만들려 했으나 사기를 당하면서 사업이 실패했다. 이 손실을 메꾸기 위해 박순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많이 끌어오라고 명했다. 신도들을 이용해 모은 사채는 약 89억원에 달했는데, 갚지 않고 쓰기만 하니 이자가 쌓였고 독촉이 심해졌다.

1987년 8월 16일 박순자에게 5억원을 빌려준 이상배가 독촉을 위해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신도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상배는 경찰에 오대양을 고소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채권자들도 박순자와 오대양을 고소, 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엄청난 사채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찰과 언론의 압박이 커지자 박순자는 전 신도들과 자기 가족을 포함한 80명을 오대양 용인 공장으로 불러 모았다. 그중 자신과 자녀들, 가장 투자자금을 많이 끌어온 신도 등 32명만 골라 식당 천장으로 올라갔다.

이들이 발견된 것은 1987년 8월 29일이다. 직원 김 모 씨가 용인 공장에 내려왔다 내려앉은 숙소 천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식당 쪽으로 갔다가 죽어있는 32명을 발견했다. 김 씨는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사실을 알렸고 박순자의 남편이 경찰에 오후 4시 무렵 신고하며 집단변사가 세상에 알려졌다.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천장 위 공간에는 속옷 또는 잠옷 차림의 시신들이 이불을 쌓아놓은 것처럼 19명, 12명씩 쌓여있었고, 공장장인 이경수가 속옷 차림으로 서까래에 목을 맨 채 조금 떨어져 있었다. 천장 위의 온도는 섭씨 71도에 달해 엄청나게 더웠다. 천장 위로 올라간 사람들이 탈수 증상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한 상황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32명 자의적 타살" 최종 결론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사진=SBS 그것이알고싶다
현장에서는 사망자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들도 발견됐다.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 "XX도 지금 매우 고통받고 있다"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이미 의식이 없으시다" "네시간 전부터 다섯명 정도 갔다"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 등의 내용이 쓰여있었다. 메모와 부검을 통한 사망 추정 시각은 발견 전날과 발견 당일로 추정됐다.

메모 내용과 상식을 뛰어넘은 광경 때문에 처음에는 타살 가능성, 음독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경찰의 부검 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안정제 성분이 발견됐다.

시신들 모두 경부 압박으로 인한 교살이 사망 원인이었고 이들 모두 교살로 인한 저항 흔적이 아예 없었다. 조사 결과 사망자들이 스스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먹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부 압박에 의해 질식해 사망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자의적으로 한 타살이라는 것.



사망자 32명 중 공장장 2명과 박순자의 두 아들 등 4명만 남성이었으며 박순자 본인을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여성이었다. 경찰은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시키도록 했고, 뒤이어 이경수를 비롯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교살시킨 후, 박순자의 두 아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목을 매 자살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공장에 모였던 80명의 신도 중 식당 천장에 올라가지 않은 48명은 공장 벽 뒤에 숨어있었고 이들은 경찰에게 들켜 나왔다.

사망자의 사망 정황은 드러났지만, 이들이 왜 집단으로 자살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경찰 당국은 사건의 열쇠를 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수배했다. 1991년 7월 수배 중이던 오대양 직원 중 6명이 자수하면서 대전지방검찰청에서 재조사됐고 검찰 수사 결과 1987년 경찰 수사와 동일하게 32명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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