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가능한가" 판사가 먼저 물었다…법정에서 필수가 된 사람들[법정블루스]

머니투데이 정진솔 기자 2024.08.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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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통역사의 세계

재판 삽화/사진=임종철 디자인기자재판 삽화/사진=임종철 디자인기자


중국인 장시영씨(가명)가 법정에 섰다. 장씨는 마약 판매상한테 돈을 받고 마약을 유통하다 직접 마약을 두차례 투약한 혐의로 구속됐다. 장씨가 재판을 받을 때 함께 법정에서 선서문을 낭독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사법통역사다.

장씨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첫 공판에서 변론을 종결했다. 판사는 선고일을 정하기 위해 "다음달 24일 오후에 통역사가 일정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통역사가 가능하다고 답하자 선고공판 기일이 정해졌다.



외국인이 피고인일 때 사법통역사는 필수 존재다. 법원조직법 제62조는 소송관계인의 국어 능력이 부족해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 경우 통번역인의 조력을 받도록 규정한다. 사법통역사는 외국인의 입과 귀가 돼 형사재판뿐 아니라 난민 소송, 범죄인 인도 재판까지 다양하게 투입된다.

정수빈 사법통역사는 "사법현장에서 급증하는 통역 수요에 대응해 내국인 사건과 다를 바 없도록 사법절차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사법통역사는 소정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 한국자격교육협회가 시행하는 시험을 통과하면 민간자격증인 '사법통역사' 자격증을 부여받는다. 여기에 법원행정처에서 1년에 한차례 실시하는 '법정 통·번역인 인증 평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수사기관에서는 별도로 자체 기준을 통해 간헐적으로 '경찰통역인'을 선발한다.

국내 외국인이 늘면서 사법통역사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공개한 '2023년 12월 통계월보'에 따르면 지난해 체류 외국인은 250만7584명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이후 4년만에 최다를 기록했다. 검찰청의 '외국인 관련 사건처리 현황'에 따르면 2003년 9338명에 불과했던 외국인 범죄인은 2022년 3만7465명, 2023년 3만9587명으로 늘었다.

특히 소수 언어의 경우 사법통역 서비스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다. 난민 사건을 많이 처리하는 서울행정법원에선 최대 35개 언어를 지원하지만 대전지법 홍성지원에서 지원하는 외국어 통역은 중국어에 그친다. 수원지법의 경우 네팔어, 몽골어, 베트남어, 수화, 중국어, 캄보디아어, 필리핀어 등 총 7개 언어를 11명의 통역사가 제공한다.


적합한 통역사가 없을 경우 법원행정처장에게 통보하고 적합한 통역사를 찾아 안내하는 절차를 거치지만 통역사 일정에 따라 재판이 밀리거나 차질이 생기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2011년 국내 사법사상 최초로 부산지법에서 열렸던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에선 통역 문제로 이름과 주소 등을 확인하는 인정신문에만 14분이 걸렸다. 당시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하고 석해균 선장에게 총상을 입힌 혐의로 기소된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통역은 재판장의 말을 영어로 통역한 뒤 소말리아어 통역이 이를 다시 피고인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3개국 언어로 순차통역됐다. 피고인들의 발언은 역순을 밟았다.



익명을 요청한 한 부장판사는 "외국인 관련 재판은 통역이 잘못되면 무죄를 유죄로 판단할 수 있다"며 "제대로 된 통역을 구하는 게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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