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폭탄 터지자 히로시마 '섭씨 7000°C' 불바다…버티던 일본 "항복"[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차유채 기자 2024.08.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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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 미군의 첫 핵무기인 '리틀보이'를 투하한 폭격기 'B-29 에놀라 게리' 동체 앞머리 모습. 첫 핵폭탄 히로시마 - 1945년 8월 6일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미국 노틸러스연구소 홈페이지 캡처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 미군의 첫 핵무기인 '리틀보이'를 투하한 폭격기 'B-29 에놀라 게리' 동체 앞머리 모습. 첫 핵폭탄 히로시마 - 1945년 8월 6일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미국 노틸러스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첫 핵폭탄 히로시마 - 1945년 8월 6일"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투하됐다. '리틀 보이'와 며칠 뒤 투하된 '팻 맨'(Fat Man)으로 일본은 항복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비로소 끝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세계는 핵의 위력과 핵전쟁 가능성에 직면했다.

'리틀 보이' 투하로 히로시마는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6㎞ 이내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됐다. 피해 면적만 여의도 땅의 1.3배에 해당하는 11㎢에 달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25만5000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리틀 보이' 투하로 7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사망과 질병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끝나지 않는 전쟁, 미국의 방안은 '핵폭탄'
맨해튼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우측) /사진=홈페이지 thoughtco 캡처맨해튼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우측) /사진=홈페이지 thoughtco 캡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느 정도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1945년 7월 26일, 일본에 항복을 권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표명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됐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이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항복했음에도 일본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이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다"는 관대한 약속을 했으나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자 8월2일 미국은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기로 결심한다.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이 선택한 방안은 '핵폭탄'이었다. 미국은 세계대전 중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존 폰 노이만 등 당대 저명한 과학자들이 차출됐다.

미국은 핵폭탄 개발에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오펜하이머 역시 "원자폭탄의 개발은 전쟁을 막을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정작 이들이 핵폭탄을 사용한 국가는 나치 독일이 아닌 일본이었다.


결재된 원폭 투하…도시의 3분의 2 쑥대밭
기사 내용과 무관한 참고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기사 내용과 무관한 참고 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으로서는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자신에 선제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데 거리낄 게 없었다.



핵폭탄 투하 결정권은 미국 대통령에게 있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전쟁 부담 및 히로시마에 대한 군사적 공격 명분 등을 확인하고 핵폭탄 투하를 결재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미군 폭격기 B29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상에 도달하기 전 약 500m 상공에서 폭발하게 고안됐다.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주변 온도는 섭씨 7000°C에 이르렀고, 도시의 3분의 2가 잿더미가 됐다. 당시 거주 중이던 약 25만5000명 중 7만명이 초기 폭발로 인해 숨졌으며 부상을 입은 7만여 명 이상의 사람들도 1년 이내에 사망했다.



현실 부정하던 일본, 이어진 팻 맨 투하에 '백기'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researchgate 홈페이지 캡처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researchgate 홈페이지 캡처
리틀 보이 충격에도 일본 군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복은 금기어였다.

미국은 다시 원자폭탄 '팻 맨' 공격을 감행했다.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였다. 이 공격으로 4만~7만명에 달하는 나가사키 시민이 희생됐다.



버티던 일본은 천황 체제 유지를 조건으로 1945년 8월 15일 정오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서 태평양전쟁은 개전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끝나지 않은 고통
원폭 투하 이후 일본 히로시마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원폭 투하 이후 일본 히로시마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1950년대 도시 기능을 상당 부분 회복했지만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사망과 질병은 온전히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개봉해 전 세계적 흥행 열풍을 일으켰던 영화 '오펜하이머'가 일본에서만 올 3월 개봉했을 정도다.

원자폭탄 생존자이자 전 히로시마 시장인 히라오카 다카시(96)는 '오펜하이머'에 대해 "영화에서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공포심을 더 실감 나게 표현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나가사키의 마사오 토모나가(80)는 "원폭 생존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담아내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고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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