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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모 말고 진짜 이모, 고모가 없는 나는 당연히 그들에 대한 로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혈연을 핑계로 엄마나 아빠 흉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존재. 매일 얼굴 보며 복작복작 지내는 가족과 달리 한걸음 떨어져 조금은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무엇보다 힘들 때 찾아가면 늘 토닥여 주며 위로해 줄 것만 같은 든든한 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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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주연은 아니었지만, 김정난은 항상 극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신사의 품격’의 박인숙, ‘SKY 캐슬’의 이명주, ‘사랑의 불시착’의 마영애에 이르기까지(이 외에도 무수한 캐릭터를 연기했으나 너무 많아 생략한다). 어느 배우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김정난은 이 배역들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처럼 꼿꼿하고 자존심 강한, 늘 뒤에 숨기보다 앞에 나서 할 말을 하는 사람. 그렇게 자신만의 확고한 캐릭터를 가질 수 있는 건 대학 시절 그를 부러워했다는 동창 고현정의 일화가 있을 만큼 공인된 탄탄한 연기력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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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자 전, 최근 기억에 남는 김정난의 배역은 ‘구미호뎐1938’의 탈의파다. 절절한 인연으로 가슴 아파하는 주인공들 사이에서 냉철한 판단으로 중심을 잡아주던, 노파라지만 젊고 예쁘며 깐깐한 원칙주의자면서도 내심 정이 많은 반전미를 지진 캐릭터. 그러고 보면 그간 김정난이 보여준 배역들이 매력 있게 느껴진 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말랑한 속내를 감추고 있어서다. 그런 그의 매력이 결국 오늘의 범자 고모를 있게 한 것일 수도.
출소 후 호피 무늬 옷을 입고 암마 제사와 전 남편 결혼식에서 ‘깽판’을 놓던 장면은 충격을 주었지만, 극이 전개되며 범자의 캐릭터는 설득력을 얻어갔다. 아들 둘에 이어 얻은 막내딸로 귀여움을 독차지했겠지만, 아버지의 외도로 홧병을 얻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연녀가 안주인으로 자리 잡는 것을 보며 범자의 성격은 점점 비뚤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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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딱서니 없지만 범자 같은 고모가 집안에 한 명쯤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너그럽고 온화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막돼먹은 사람을 보면 시원하고 찰지게 욕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고모. 그런데 이모는 많은데 고모는 왜 이렇게 흔치 않을까. 아마도 이는 우리 사회에서 고모와 이모가 가지는 심정적위계적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은 외가보다 친가에서 힘이 세다. 집안의 대소사 결정에 권위를 가진 것은 고모다. 영화 ‘파묘’의 고모(박정자 분)를 기억해 보라. 범자의 매력 중 하나는 그가 고모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간 저지른 다양한 사고로 인해 그럴 처지가 못 돼서겠지만.
아무튼 모두의 바람(?)대로 범자가 용두리 장국영 영송과 잘 되었으면 좋겠다. 더는 사랑 때문에 상처받지 않기를. 그리고 에필로그로 아니, ‘눈물의 여왕’ 번외 버전으로 범자를 주인공으로 한 ‘재벌 집 막내딸’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동안 범자는 어떤 남자들을 만났고 왜 이혼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째, 김정난 덕에 범자 고모에 과몰입한 나만 재밌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