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원한다면…한국, 젊은 과학자 이탈부터 막아야"

머니투데이 박건희 기자 2024.03.2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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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일본 최고 연구 기관 이화학연구소(RIKEN)의 사쿠라이 히로요시 니시나센터장

15일 IBS 대전 본원에서 머니투데이와 인터뷰 중인 사쿠라이 히로요시 RIKEN 니시나센터장.  /사진=IBS15일 IBS 대전 본원에서 머니투데이와 인터뷰 중인 사쿠라이 히로요시 RIKEN 니시나센터장. /사진=IBS


"노벨상은 '세렌디피티(serendipity·뜻밖의 기쁨)'와 같습니다. 거듭된 실패 끝에 발견한 현상에서 찾아오는 뜻밖의 기쁨이지요. 과학자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국가는 기초과학을 든든히 지원한다면 반드시 '혁신'을 이룹니다."

일본의 자연과학 종합 연구기관 이화학연구소(RIKEN)의 사쿠라이 히로요시 니시나센터장은 최근 기초과학연구원(IBS) 대전 본원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RIKEN은 1917년 설립된 이래 연구소 내에서만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2명과 노벨화학상 수상자 1명을 배출한 '노벨상의 산실'이다.



니시나센터는 그중에서도 핵물리연구의 거점이다. 1990년부터 운영한 세계 정상급 중이온가속기 RIBF(방사성동위원소 빔 생성시설)'를 활용해 발견한 '신원소'가 대표적인 성과다. 연구팀이 발견한 신원소에는 발견국인 일본의 이름을 따 '니호늄(Nh·주기율표 113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기율표 탄생 이래 아시아 국가로서는 최초의 성과였다.

올해 한국에서도 '최초의 발견'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이 5월 첫 실험을 앞두고 있다. 라온은 정부가 10년에 걸쳐 약 1조 5000억원을 투자하며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프로젝트'라 불린다. 수소이온과 중이온을 표적 원소에 충돌시켜 나오는 빔을 활용해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낸다. 지난해 6월 저에너지 구간에서 빔을 내뿜는 시운전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세계 순위권서 자꾸 밀려나는 일본 과학…"한국, 젊은 과학자 이탈 막아야"
사쿠라이 센터장은 라온의 첫 건설 당시부터 국제자문단에 소속돼 자문을 맡았다. 대표단 19명을 이끌고 IBS 희귀핵연구단과 중이온가속기연구소(IRIS)의 현장 연구자를 만난 이번 한국 방문에서 처음으로 라온의 완성된 모습을 봤다. 그는 "정말 깜짝 놀랐다"면서 "'한국이 이 정도까지 성공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니시나센터에서 연구 중인 젊은 한국 과학자들의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센터에서) 함께 연구하는 일본 연구자들이 한국 연구진의 성과를 보며 큰 충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과학은 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시아 최다 노벨상 수상국(29명)인 일본의 기초과학계는 최근 위기를 맞았다. 사쿠라이 센터장은 "일본 과학계는 2010년부터 논문 실적, 논문 피인용수 등 연구의 질을 가늠하는 평가 지수에서 10년 째 줄곧 하락세"라며 "세계 3~4위였던 연구 성과 순위에서 점점 밀려나 이제는 인도에게 자리를 내줬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세계 탑급' 연구에서 일본이 차지했던 비율이 낮아지는 모양새"라고 덧붙였다.


가장 큰 이유로는 '젊은 과학자 부족'을 꼽았다. 그는 "일본 대학의 조교수 임용률이 낮아지는 등 젊은 이공계생들이 석박사 과정을 밟더라도 정규직 자리를 얻기 어렵게 됐다"며 "이공계를 선택하는 학생의 비율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공계로 진학한 학생 중에선 안정성을 이유로 학계가 아닌 산업계를 선택하는 수가 늘었다"고 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연구기관인 RIKEN 마저도 운영 및 연구 예산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사쿠라이 센터장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연구 예산은 매년 2%씩 줄고 있다"며 "2022년 고노카미 마코토 이사장이 부임하면서 예산을 증액하기 위해 정부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중이온가속기의 경우 예산 삭감에 따른 영향이 치명적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가속기를 활용하고자 하는 실험 제안서는 쏟아지지만 운영비에 한계가 있어 실제 가동할 수 있는 날은 한정돼 있다"며 "가속기를 가동하는 날이 늘어날수록 뛰어난 연구 성과가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과학계를 강타한 R&D(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대해 "지금 당장은 영향이 없어보여도 점점 가시화한 결과가 나온다"며 "문제 해결력이 뛰어난 젊은 인재를 빼앗겨 결과적으로 국가 과학연구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한국도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젊은 과학자가 좋은 성과를 내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노벨상은 '뜻밖의 기쁨'…"혁신적인 연구 성과는 '꾸준함'에서 온다"
사쿠라이 히로요시 센터장이 이끄는 니시나센터 대표단은 최근 희귀핵연구단과 중이온가속기연구소(IRIS)를 차례로 방문했다. 사진은 IBS 대전 본원을 방문한 대표단의 모습. /사진=IBS사쿠라이 히로요시 센터장이 이끄는 니시나센터 대표단은 최근 희귀핵연구단과 중이온가속기연구소(IRIS)를 차례로 방문했다. 사진은 IBS 대전 본원을 방문한 대표단의 모습. /사진=IBS
니시나센터에서는 RIBF를 활용한 국제 공동연구가 활발하다. RIKEN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연구 교류를 이어온 IBS의 핵물리연구단 연구팀도 센터 현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이라는 전언이다.

RIBF를 활용한 연구는 최근 신약 개발, 생물학, 우주산업까지 나아갔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활용한 방사성의약품은 암 치료 등에 활용된다. 그런가하면 방사선을 쬔 미생물에 어떤 돌연변이가 생기는지 연구 중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품종 미생물을 발견할 수 있다. 우주 산업과도 직결된다. 우주로 발사된 각종 관측 기기는 강력한 우주선(cosmic ray)의 영향을 받아 손상될 수 있다. 니시나센터 연구팀은 강한 방사선의 영향을 받은 반도체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확인 중이다.

사쿠라이 센터장은 "중이온가속기의 활용 범위가 기존 기초과학에서 확장돼 산업계 주도로 이뤄지는 신약 및 신품종 개발 등으로까지 뻗어나갔다"고 말했다. 또 "그 기반에는 수십 년간 중이온가속기의 성능을 입증한 기초과학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라온은 올해 5월 첫 활용 연구에 돌입한다. 국내 연구자를 대상으로 라온을 통해 수행할 실험 제안서를 접수했고 현재 첫 활용연구가 될 연구 주제를 심사 중이다. 한국 최대 기초과학 프로젝트의 첫 시작인만큼 라온을 통해 국내에서도 '노벨상급'의 혁신적인 과학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는 시점이다.

사쿠라이 센터장은 "혁신적인 연구 성과는 '꾸준함'에서 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벨상은 '세렌디피티'와 같다"고 말했다. 세렌디피티는 '뜻밖의 기쁨'이라는 영단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를 보면 실험에 실패한 뒤 '왜 실패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을 시작으로 연구를 거듭하며 우연한 기회를 통해 혁신적 발견을 이뤄냈다"고 설명했다.

우연찮게도,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은 '기쁨'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라온이 이제 놀라운 모습을 갖췄다"며 "한국의 발전 속도는 놀라운 수준"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자신감을 갖고 차근차근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언젠가 '뜻밖의 기쁨'을 찾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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