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의병학살 만행의 중심…조선 한복판에 들어 앉았다 [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이소은 기자 2024.03.0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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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조선통감부 청사. /사진=위키미디어조선통감부 청사. /사진=위키미디어


일본제국주의는 1906년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조선통감부를 세웠다. 1910년 8월 주권의 상실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사실상 한국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구였다.

초대 통감은 추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로 최후를 맞이한 이토 히로부미. 일본에서 내각총리대신(현대의 총리격)을 역임한 이토는 1906년 3월 2일 조선을 지배하는 총독격인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누구?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히로부미. /사진=위키미디어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히로부미. /사진=위키미디어
이토는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출생으로 일본 메이지유신을 이끈 인물 중 한명이다. 대일본제국 헌법 초안 작성, 현 일본 내각제 시행, 양원제를 포함한 의회제도 확립, 일본 민법 제정에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제국의 제 1·5 ·7·1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총리로서는 도합 7년 6개월을 지냈다. 1885년 만 44세 2개월의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했고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를 앞두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1963년부터 1984년까지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이었을 정도로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적인 존재이며, 이로 인해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 당해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1906년 3월 2일부터 1909년 6월 13일까지 4년여 동안 통감부 통감으로 한국을 통치하면서 제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부리고 의병학살, 토지 수탈 등 만행을 일삼았다.

이토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 의해 저격당해 숨을 거둔다. 당시 나이 68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 후 법정에서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조선통감부, 왜 설치됐나
조선 통감부는 조선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세워졌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승리 후 조선을 독자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되자 침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면서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장사 및 행정 등을 장악하며 직접 통치하도록 했다.

1905년 11월 22일 '통감부 및 이사청을 설치하는 건'을 공포, 같은 해 12월 20일에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해 통감부에 통감을 두게 됐다. 업무는 이듬해 2월 1일부터 개시했으며 설립 후에 한 달은 조선 주둔 사령관 하세가와 유시미시가 임시통감을 맡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정식 취임한 것은 같은 해 3월 2일이다. 이토는 을사늑약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 1905년 12월 21일 일왕의 특지를 받아 임명됐다.

통감부 4년 6개월 간의 횡포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사진=위키미디어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사진=위키미디어
을사늑약 체결 당시, 통감의 권한은 오직 외교와 국방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통감부는 외교뿐 아니라 행정·금융·종교·교육 등 국정 전반을 지휘·감독, 한국의 통치 조직을 해체하는 역할을 했다.

통감은 행정 전반에 대한 집행을 한국 정부에 요구할 수 있었고, 집행 후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할 수도 있어 국정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무·경무 부분은 일본인을 고용해 일본 내각과 비슷하게 운영했고 한국 정부가 고등 관리를 임명할 때도 반드시 통감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완용 등 친일 내각과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는데 이후 한국의 통치권은 사실상 통감에게 넘어갔다. 한국 대신들의 정기·임시 회의는 통감 관저에서 열렸고 주요 행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통감의 뜻을 강요했다. 통감부의 통치가 강화될수록 국민의 저항도 세졌는데 일본은 헌병·경찰·군의 무력을 동원해 탄압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 문제였던 간도 영유권은 본래 통감부의 기능인 외교를 명목 삼아 청에 넘겼고 대신 일본은 만주 개발권을 얻는 등 대륙 침략 정책에도 활용했다. 조선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박탈하는 등 한국이 모든 자주권을 상실하게 했다.

통감부는 1910년 9월 20일 한일병합 및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에도 약 한 달간 존속하다가 같은 해 9월 30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공포되고 다음 달 10월 1일 시행되면서 완전히 폐지, 조선총독부로 개편됐다.

조선총독부로 개편, 그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 /사진=위키미디어조선총독부 청사. /사진=위키미디어
조선총독부는 통감부를 전신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직후 출범했다. 1945년 9월 2일까지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위해 운영하던 직속 기관으로 경복궁 내에 있었다. 초대 조선총독은 앞서 통감으로 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했다.

조선총독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이 공식적으로 패전한 이후에도 몇 주간 한반도 지역을 관리하다가 1945년 9월 3일부로 38도선 이남 지역을 미군정에 인계하고 1945년 9월 28일 공식 소멸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서다. 1993년 문민정부 시대를 연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직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결정했다. 일본침략의 상징 공간을 그대로 둠으로써 오히려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김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통해 총독부 건물 철거를 발표했다.

일제 강점 86년, 건설된 지 70년 만인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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