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 ‘파묘’로 커리어 하이? 전성시대는 지금부터

머니투데이 이설(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2.2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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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극장가에 봄을 불러온 충무로의 잔다르크

사진=BH엔터테인먼트사진=BH엔터테인먼트


여배우들이 하기 싫어하는 배역이 분명히 있다. 배우 이전에 그들도 사람이라, 예쁘고 멋진 역할에 더 눈이 가게 마련이다. 그 반대편의 배역은 아무래도 주저하게 된다. 첫째, 애 엄마 역할이다. 20∼30대 젊고 잘 나가는 여배우들에게 아이가 있는 유부녀 역은 부담스럽다. 마음속으론 항상 로맨스의 여주인공이길 바라고 있는데 유부녀에 애까지 있다면 꺼릴 만하다.

둘째는 노출이 많은 캐릭터다. 벗는 연기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웬만한 감정신보다 훨씬 섬세한 심리 표현이 필요하고, 맨몸이 노출되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더구나 노출 이후 선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악플로 인한 심리적 타격도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지가 고착화하는 선입견도 생길 수 있다. 신인이라고 해도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셈이다. 따라서 명작 베드신일수록 그 뒤에는 감독과 배우의 치밀한 계산과 부단한 노력이 숨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갑자기 여배우론을 꺼낸 이유는 영화 ‘파묘’(감독 장재현)에서 김고은이 보여준 연기에 대해 논(論)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개봉한 ‘파묘’는 26일까지 닷새간 262만7747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기대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설 연휴도 끝나 버린 비수기이고, 오컬트라는 장르적 한계도 있어 보이는데 계속 극장으로 관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흥미진진한 줄거리나, 감독의 연출 역량도 있겠지만 최민식이 극찬했을 정도로 빼어난 김고은의 무당 연기가 크게 한몫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진=쇼박스사진=쇼박스


‘파묘’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무덤을 파헤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을 그린 작품. 최민식과 유해진이 각각 풍수사와 장의사를 연기했고, 김고은은 무당 이화림을 맡았다. 작은 장르 영화인 줄 알았는데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 블록버스터급이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무당으로 변신한 김고은의 연기가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 무당도 앞서 말한 엄마 역할 못지않게 젊은 여배우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캐릭터 중 하나다. 기존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무속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이해가 된다. 알록달록한 컬러의 한복을 입고 신들린 굿을 하는 중년의 여성. 젊은 여배우가 하기엔 좀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김고은은 이런 고정된 이미지를 여지없이 깬다. 패션 스타일부터가 신선하다. 이화림은 매우 ‘용한’ 무당이지만 평소엔 MZ세대 스타일을 즐긴다. 긴 생머리에 가죽 코트나 셔츠 차림이다. 말투도 현대 직장여성들의 그것과 같다. 가끔 내키지 않을 때 욕을 내뱉는 것 말고는 그리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무속인의 ‘모드’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표정과 분위기가 바뀐다. 영화 속에서는 무덤을 파는 도중에 굿을 하는 장면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바로 최민식이 칭찬한 대목이다. 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깨를 불규칙적으로 흔들며 꿈틀거리는 모습이 단번에 시선을 붙잡는다. 리얼리티와 동시에 미스터리를 자아낸다. 손에 칼을 들고 하는 격렬한 춤사위는 인간과 신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분위기를 절로 만들어낸다. 신들림이 절정에 오르자 끝내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다시 빼내어 자신의 입가에 시꺼먼 줄을 긋는다. 기괴하기 짝이 없고 섬뜩해서 머리털이 곤두선다.


사진=쇼박스사진=쇼박스
김고은은 실제 무속인을 초빙해서 굿의 전반적인 과정을 익히면서 춤과 몸짓을 배웠다. 자칫 어설픈 동작이나 말이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연습을 거듭했다. 이 장면은 하루 만에 촬영을 완료했다고 한다. 연속성을 가지고 한 번에 물 흐르듯 해내는 것이 중요하므로 카메라 4대를 한꺼번에 틀어놓고 찍었다. 즉, 춤을 추기 시작하면 ‘원 컷-원 신’의 형태로 끝까지 촬영했음을 뜻한다. 배우가 모든 것을 숙지한 채로 역할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고는 시도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김고은은 2012년 ‘은교’(감독 정지우)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박범신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은교’는 위대한 노(老)시인 이적요(박해일)와 그를 존경하고 질투하는 제자 서지우(김무열), 그리고 둘의 삶에 끼어든 당돌한 소녀 은교(김고은)의 이야기다. 은교를 연기한 김고은은 매우 파격적인 노출 연기를 소화했다. 특히 엔딩에서 전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놀라운 근성을 보여줬다.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수상을 포함해 그해 모든 신인상은 김고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은교’의 그림자가 컸다. 그후 김고은은 한동안 ‘소포모어(2년차)’ 징크스에 시달리는 듯했다. 영화 ‘몬스터’(2014)에서 변신을 꾀했으나 아쉬웠고, ‘협녀, 칼의 기억’(2015)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전에 몇몇이 그래 왔던 것처럼 김고은도 수위 높은 노출 연기에 발목이 잡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진=쇼박스사진=쇼박스
그러나 드라마 ‘치즈인더트랩’(2016)과 ‘도깨비’(2017)를 통해 도약했다. 고정된 이미지를 벗고 오히려 더 통통 튀거나, 순수한 모습의 여주인공으로 탈바꿈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에, 첫사랑 같은 청순한 이미지로 노출 연기의 잔상을 없앴다. 김고은이 가진 배우로서의 양면성, 그리고 장르를 가리지 않는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운 ‘대전환’이었다.

그런데 ‘파묘’는 김고은의 필모그래피에서 두 번째 변곡점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돌하면서도 맑고 순수하던 그는 이번엔 매우 이질적인 캐릭터에 도전했고, 스스로 연기의 지평을 넓혔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김고은은 일영 역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김혜수와 함께 주연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로 박수받았다. 두 여배우의 카리스마 대결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은 그해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됐는데 김고은은 칸 집행위원장에게 또 한 번 찬사를 들었다. "일영에 완벽하게 녹아든 그녀는 제2의 전도연이 될 것이다." 전도연은 ‘밀양’으로 2007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여배우로서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런 평가가 이제야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제2의 전도연'이란 찬사를 받은 지 9년이 지났고 김고은은 이미 정상의 배우로 자리매김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혜수나 전도연에 버금가는 전천후 대형 여배우의 탄생과 전진을 기대해본다. 그가 앞으로 보여줄 또 다른 파격이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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