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권리를 박탈한 죄"…하얼빈서 울린 총성, 세계를 흔들다[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이소은 기자 2024.02.1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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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안중근이 준비한 총알 6발 중 2발은 명중했다. 총을 맞은 이는 조선통감부의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당시 30세였던 안중근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돼 만주 뤼순 감옥에 갇혔다. 밸런타인데이로 알려진 2월 14일은 안중근이 사형을 선고받은 날이다. 그는 사형선고 한 달 반만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을 당했다.

왜 이토 히로부미 암살했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은 사건 당일 미국 LA헤럴드 등 신문 1면 톱기사로 보도되며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하얼빈 이론 총영사관에서 시작된 조사에서 안중근은 "이토 공작을 왜 원수로 여기는가"라는 일본 검사의 질문에 15가지 의거 명분을 막힘 없이 술술 대답했다.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번째,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열다섯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사진제공=국가보훈처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안중근은 누구인가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 기운에 응해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 부르는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지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것으로 무거울 중(重)에 뿌리 근(根)자를 썼다.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한 할아버지 덕에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나 자라면서 무술에 더 열중했고 특히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다. 1895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우리가 잘 아는 '도마 안중근'의 '도마(Thomas)'도 이때 얻은 세례명이다.

안중근은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다 이듬해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1906년 상점을 판 돈으로 삼흥학교를 세웠다.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으나 국운이 극도로 기울면서 '합법적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여했다.

1909년에는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어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것'을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암살은 어떻게 진행됐나
= (하얼빈=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9일 중국 하얼빈시 하얼빈역에 세워진 안중근의사기념관 내 대형 유리창 너머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이 보인다.  한자로 안중근격폐이등박문사건발생지(安重根擊斃伊藤博文事件發生地)라고 씌여있다. 2014.5.9/뉴스1 = (하얼빈=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9일 중국 하얼빈시 하얼빈역에 세워진 안중근의사기념관 내 대형 유리창 너머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이 보인다. 한자로 안중근격폐이등박문사건발생지(安重根擊斃伊藤博文事件發生地)라고 씌여있다. 2014.5.9/뉴스1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러시아군들이 쫙 깔린 하얼빈역에서 진행됐다.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의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이 역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오전 9시 15분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 안에서 약 25분 정도 코콥초프와 대화한 후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의 총알이 날아왔다.

총알 2발이 이토 히로부미의 복부에 맞았다. 안중근은 혹시 총을 맞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나머지 총알로 주위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하얼빈 주제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를 쐈으며 자신을 죽이려 다가오는 일본군 장교 1명을 사살했다.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를 부축했고 수행원들도 다급하게 그를 보호했다. 이때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러시아 헌병에 체포됐다.

체포 이후의 안중근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 변호를 자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와 가마타 세이지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듬해 2월 14일, 2월 7일부터 다섯차례의 공판을 치르고 6번째 이뤄진 공판에서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는 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마라'는 어머니 조마리아의 말처럼 안중근 의사는 항소 없이 주어진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같은 해 3월 26일 오전 9시, 어머니가 준비한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동생 안정근, 안공근과 마지막 면회를 가졌다. 한 시간 이후 오전 10시 안중근은 교수형으로 순직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유해

(서울=뉴스1) 황기선 기자 = 여·야 국회의원들이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앞 계단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봉환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결성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4.27/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서울=뉴스1) 황기선 기자 = 여·야 국회의원들이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앞 계단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봉환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결성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4.27/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중근은 생을 마감하기 전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이 유언은 1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당시 감옥법에 따르면 사형이 집행된 유해는 가족들에게 인도돼야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안중근의 유해를 인도하지 않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안중근의 장지가 항일운동 성지가 될 것으로 우려해서다.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의 시신은 감옥 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감옥 묘지 위치에 대한 자료가 없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던 날 뤼순 감옥 전체 자료가 모두 불에 탔기 때문이다.

실마리가 나타난 것은 2008년. 안중근 순국 당시 뤼순 감옥 소장의 딸이었던 이마이 후사코(당시 8세)가 제보한 사진 한장을 가지고 우리 정부가 뤼순 감옥 뒤쪽 일대 약 3000m 정도 지역을 정밀 탐사했다. 하지만 안중근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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